Ultra quiz show
ニューヨークへ行きたいかー! どんなことがあっても、ニューヨークへ行きたいかー!
1977년 日本テレビ에서 방영 시작한 버라이어티. アメリカ横断ウルトラクイズ의 오프닝멘트.
마침 해외여행의 광풍이 불던 일본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준 TV프로그램. 오프닝 멘트만으로도 아직도 가슴이 뛰게 만드는 신기한 느낌.
내게 남은 기억은 “탈락자는 바로 귀국”이라는 이규형이 이야기하던 일본 방송의 가학성보다는 초기 방송에서 1차 예선 무대이던 고라쿠엔 구장의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규형이 보던 울트라퀴즈쇼는 80년대 후반, 도쿄돔 시절이겠군. 그렇다면 정확한 평가일지도..)
아침일찍 푸르스름한 새벽에 수만명이 고라쿠엔 구장 주차장에 모여서 구호를 외치면서 출정식 분위기를 내고, 정오의 햇살아래 퀴즈를 풀면서 환희하고, 절망하며, 저녁노을 아래서 진출자를 결정하던 그런 모습.. 쇼와 로망이라고나 할까…
고라쿠엔의 마지막 예선, 도쿄돔이 함께 보이는 것이 절묘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나라는 인간의 추억, 경험이 왜곡되는 느낌이 든다. 내가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야구 열기를 느껴본 적이 없잖아. 물론 80년대 해외야구 코너에서 보여진 깔끔한 인조잔디가 깔린 일본 구장의 모습정도.
90년대 일본 대중문화에서 추억하는 80년대 프로야구 문화 정도.
그래도 그 감성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쇼와로망에 대해서 썰을 풀 수 있는거지. 일본 아재들과도. ㅋㅋ
昭和ローマンと後楽園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떠들던 시대
사람들은 흔히 그 시절을 버블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늘 조금 아쉽다. 버블이라는 말은 너무 경제의 언어이고, 너무 나중에 붙여진 이름 같다. 그 말만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표정이나 목소리, 그리고 거리의 공기까지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 시절은 자산 가격의 상승이었겠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떠들고, 더 쉽게 같은 열기 속으로 들어가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버블시대라는 말보다 다른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쇼와 로망. 숫자보다 체온에 더 가까운 말이다.
그 체온을 가장 잘 기억하게 만드는 장소 가운데 하나가 고라쿠엔이다. 고라쿠엔은 단순한 야구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도시가 집단으로 흥분하는 법을 아직 잊지 않았던 시절의 무대였다. 무엇인가 열리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누군가 외치면 다 같이 소리를 지르고, 하루가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던 장소. 지금 돌아보면 고라쿠엔은 시설이라기보다 분위기였다. 조금은 낡고, 조금은 번잡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고라쿠엔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울트라퀴즈다. 새벽 어스름에 참가자들이 모여들고, 서로를 격려하며 안으로 들어가고, 스탠드가 함성으로 들썩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줄어들고, 저녁 무렵이 되면 하루 전체가 하나의 긴 서사처럼 남는다.
울트라퀴즈는 퀴즈쇼였지만, 사실 문제를 푸는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시대의 열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으로 간다는 설정도 물론 중요했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같은 꿈의 입구를 바라본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정답을 맞혔는가보다, 군중 전체가 한꺼번에 반응하던 순간이 더 오래 남는다. 그래서 울트라퀴즈의 기억은 승부의 기억이라기보다 열광의 기억에 가깝다.
그 시절의 텔레비전은 지금보다 거칠었고, 그래서 더 뜨거웠다. 지금은 취향이 잘게 나뉘어 있지만, 그때는 모두를 한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면을 보고, 다음날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감각. 거기에는 아직 “대중”이라는 것이 있었고, 군중이라는 말이 꼭 부정적으로만 들리지 않던 시절의 힘이 있었다.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떠들었다는 것은 단지 세련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감정이 지금보다 훨씬 쉽게 전염되던 시대였다는 뜻이다.
그 시대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늘 담배연기가 함께 따라온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답답하고 불편한 풍경이지만, 그때의 기억 속에서 담배연기는 단순한 흡연 이상의 것이었다. 킷사텐 천장 아래 천천히 퍼지던 연기, 야구장 스탠드 사이를 떠다니던 연기, 일이 끝난 뒤 한숨처럼 뿜어지던 연기. 그것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같은 공기를 나눠 마시며 살던 시절의 질감이었다. 각자 분리된 공간에 있기보다, 서로의 피로와 기분이 조금씩 뒤섞인 채 살아가던 시대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쇼와 로망이라는 말은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조금 더 가까웠던 시절, 공간은 지금보다 더 좁고 공기는 더 짙고 감정은 더 직접적이던 시절을 부르는 감정의 이름이다. 고라쿠엔, 담배연기, 울트라퀴즈 이 단어들은 분야는 다르지만, 묘하게 같은 온도를 갖고 있다. 세련됨 이전의 활기, 효율 이전의 흥분, 각자도생 이전의 군중감각. 지금의 우리는 그 시절의 불편함도 알고, 과장도 안다. 그런데도 자꾸 그 단어들 앞에서 멈춰 서게 되는 이유는, 아마 그 안에 사람들이 서로의 기분 속에서 같이 살던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공기일 것이다. 고라쿠엔의 함성, 스탠드를 떠돌던 담배연기, 울트라퀴즈가 열어젖히던 집단의 흥분, 그리고 저녁빛 속에서 차갑고도 다정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鮎川まどか의 얼굴을 한 시티팝.
그것들은 제각기 다른 장소와 매체와 장면에 속해 있지만, 이상할 만큼 같은 온도를 품고 있다.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떠들고, 더 쉽게 서로의 기분에 물들던 시대. 쇼와 로망이란 어쩌면 그런 시간에 붙는 이름일 것이다. 버블은 지나간 경기였지만, 로망은 아직도 기억 속에서 저녁빛처럼 남는다.
special thanks: 鮎川まどか
시대는 결국 한 사람의 얼굴로 기억될 때가 있다. 고라쿠엔이 낮의 열기였다면, 그녀는 저녁의 기분이었다. 시티팝을 배경으로 하는 그녀는 그 밤이 품고 있던 망설임과 세련과 쓸쓸함의 표정이었다.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떠들던 시대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끝내 말해지지 않는 감정의 시간이 있었다. 쇼와 로망이 단지 군중의 함성만이 아니라, 해 질 무렵 문득 사람을 멈춰 세우는 어떤 눈빛까지 포함하는 말이라면, 그 이름은 아마도 이것이어야 한다. 鮎川まど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