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転寿司


AI로 글쓰기 생각보다 재미 있네.

시작은 이렇다. 삿포로 여행에서 スシロー. 프로모션 中ドロ 120엔. 이게 왜 맛있는데? 프로모션이니 평소 가격이 아닌걸 고려해도 이 가격에 이 맛은 너무하잖아.

이건 대기업만이 가능한 맛이다. 모든 비용을 쌀과 네타에 집중하고, 다시 대량구매로 가격을 낮추고. 샤리는 기계가 만들고 파트타임들이 포장된 네타를 얹기만 해서 만든 물건. 가격의 99%가 재료비겠네.

이건 장인의 실력을 부정하는 거다. 스시는 재료맛이고 나머지는 부가적이다. 라고 주장하는 거다.

이걸 제대로된 글로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AI와 대화로 정리한 것이 다음 글이다.


회전스시는 스시의 배신자인가

후나즈시에서 니기리즈시로, 그리고 회전스시로

회전스시를 스시 문화의 타락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기계가 만든 사리, 표준화된 네타, 터치패널 주문, 레일 위로 도착하는 접시. 거기에는 장인의 손끝도, 카운터의 긴장감도 없다. 계절의 서사는 프로모션 품목에 있다. 오늘날 고급 스시야가 스시의 정점처럼 말해지는 시대에, 회전스시는 종종 스시의 대중화라기보다 스시의 해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시의 역사는 다르게 말한다.

스시는 처음부터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니기리즈시, 즉 손으로 쥔 생선초밥의 형태였던 것이 아니다. 더 오래된 스시는 생선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밥과 소금으로 발효시키는 음식이었다. 시가현의 후나즈시, 흔히 붕어초밥으로 알려진 음식은 그 오래된 형태를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는 사례다. 후나즈시는 기다림의 음식이다. 생선과 밥과 소금, 그리고 긴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다. 강한 냄새와 산미, 발효의 깊이를 가진.

오늘날 우리가 “스시”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그 반대편에 있다. 니기리즈시는 발효의 긴 시간을 줄인 음식이다. 식초를 이용해 산미를 만들고, 생선을 손질해 밥 위에 얹어 즉석에서 먹는다. 에도 시대의 도시적 속도 속에서 니기리즈시는 빠르게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고급 스시야의 카운터에서 한 점씩 조용히 받아먹는 음식이 되었지만, 그 출발은 오히려 패스트푸드에 가까웠다.

여기서 한 명의 가상적인 후나즈시 장인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는 처음 니기리즈시를 보며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스시는 그런 음식이 아니다. 스시는 생선 위에 밥을 얹어 빨리 먹는 기술이 아니다. 스시는 기다림이다. 계절의 변화, 물의 온도, 소금과 쌀의 발효,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시간이 함께 만든다. 사람의 손은 자연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무너지지 않게 돌보기 위해 있는 것이다. 식초로 산미를 만들고 즉석에서 쥐어내는 니기리즈시는 편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스시에서 시간이 갖던 가치를 부정한다.

이 말은 완고한 보수주의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후나즈시의 세계에서 스시란 시간을 다루는 음식이었다. 발효를 기다리고, 계절을 견디고, 자연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음식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니기리즈시는 분명 급진적인 변형이었다. 그것은 오래 기다리는 음식을 즉석에서 먹는 음식으로 바꾸었고, 자연의 산미를 식초의 산미로 대체했으며, 발효의 시간을 손기술의 시간으로 압축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니기리즈시를 스시의 표준처럼 생각한다.

한때는 시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변형처럼 보였을 음식이, 어느 순간 전통의 중심이 된다. 문화는 이렇게 변한다. 원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형이 특수한 전통으로 물러나고 변형이 보통명사가 된다.

그렇다면 회전스시는 어디에 놓이는가.

회전스시는 니기리즈시가 이미 한 번 수행했던 시간 단축을 더 밀어붙인다. 다만 이번에는 식초와 손기술이 아니라, 기계와 공급망과 자본이 그 일을 한다. 에도의 니기리즈시가 발효의 시간을 줄였다면, 현대의 회전스시는 숙련의 시간을 줄인다.

150엔짜리 주도로를 먹는다. 기계가 만든 사리 위에, 대량 유통된 네타가 올라간다. 숙련된 장인이 아니라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직원이 그것을 완성한다. 그런데 맛있다. 최고급 스시야의 주도로와 같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가격을 생각하면 그것이 충분히 맛있다는 데 있다.

그 순간 회전스시는 하나의 질문이 된다.

스시의 맛은 어디에서 오는가. 장인의 손끝에서 오는가. 아니면 원재료, 유통, 냉장 기술, 구매력, 표준화된 조리 시스템에서 오는가.

회전스시의 힘은 단순한 기계화가 아니다. 그것은 대량 구매, 냉장 유통, 매뉴얼화된 노동, 균일한 샤리, 안정적인 가격의 결합이다. 고급 스시야가 한 사람의 이름과 감각을 중심으로 조직된다면, 회전스시는 익명의 시스템으로 조직된다.

알바생이 장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장인성을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나즈시 장인의 불안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후나즈시의 눈에 니기리즈시가 그랬듯, 오늘날 우리의 눈에 회전스시는 스시에서 어떤 중요한 시간을 지워버리는 음식처럼 보인다. 다만 시간의 종류가 다를 뿐이다. 니기리즈시가 발효의 시간을 줄였다면, 회전스시는 숙련의 시간을 줄인다. 니기리즈시가 기다림의 가치를 손기술로 대체했다면, 회전스시는 손기술의 가치를 시스템으로 대체한다.

그래서 회전스시는 스시의 외부에서 온 파괴자가 아니다. 스시 안에 오래전부터 있던 충동, 즉 시간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이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달하려는 충동이 산업화된 결과다.

후나즈시가 시간의 스시였다면, 니기리즈시는 시간을 압축한 스시였다. 회전스시는 그 압축을 시스템으로 극대화한 스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은 있다. 후나즈시가 지방음식과 전통음식으로 물러났듯, 니기리즈시의 장인적 형식도 언젠가 특수한 고급문화로 물러날 수 있다. 대중이 스시라고 부를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카운터 앞의 한 점이 아니라, 레일 위로 도착하는 접시가 될 수도 있다. 문화의 중심은 늘 원형을 가장 충실히 보존한 쪽에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회전스시를 보며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회전스시는 스시를 망치는가. 아니면 스시가 늘 해왔던 일을 다시 하고 있는가.

아마 답은 둘 다일 것이다. 회전스시는 어떤 스시의 기억을 지우면서, 또 다른 스시의 가능성을 만든다. 그것은 전통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전통의 반복이다. 장인의 기술은 발효의 기다림을 밀어내며 스시의 중심에 섰고, 이제 시스템이라는 다음 물결에 밀려 다시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