ああ、上野駅


일본의 황금알 세대. 이 세대를 그린 이야기. 그리고 황혼이혼까지.

1장. 하치오지도 도쿄니까

사에코는 아침마다 남편의 말끝을 들었다.

“다녀오겠소.”

마사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몇 해가 지나자, 그는 더 이상 고향 말로 아침 인사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갔다 올게”였고, 그 다음에는 “다녀오겠습니다”가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회사에서 배운 것처럼 짧고 딱딱하게 “다녀올게”가 되었다.

하지만 사에코는 안다. 그 말끝에 아주 가느다란 아키타가 남아 있다는 것을.

문장 끝이 조금 내려앉는다. 혀가 한 박자 늦게 움직인다. 피곤한 날이면 더 그렇다. 밤새 잔업을 하고 돌아와 세 시간만 자고 다시 공장으로 나가는 아침이면, 마사오는 표준어를 끝까지 붙들 힘이 없다.

그럴 때 사에코는 일부러 더 또렷하게 대답했다.

“다녀오세요.”

그 말은 남편에게 하는 인사이기도 했고, 자신에게 하는 명령이기도 했다.

오늘도 틀리지 말 것. 오늘도 흐트러지지 말 것. 오늘도 이 집이 도쿄의 집처럼 보이게 할 것.

마사오가 현관문을 열자 아직 식지 않은 밥 냄새와 세탁비누 냄새가 복도 쪽으로 빠져나갔다. 문밖에는 같은 모양의 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른쪽 세 번째 집에서는 이미 라디오 체조 음악이 흘러나왔고, 아래층 어딘가에서는 아이가 울고 있었다. 사택단지는 아침마다 동시에 숨을 쉬었다. 남편들이 나가고, 아이들이 일어나고, 주부들이 부엌과 베란다 사이를 오갔다.

“오늘 늦어질지도 몰라.”

마사오가 구두를 신으며 말했다.

“잔업?”

“본사에서 사람이 온대.”

그가 ‘본사’라고 말할 때, 사에코는 아주 잠깐 남편의 목소리가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검사?”

“아니. 공정 확인이라나.”

마사오는 웃으려 했다. 하지만 웃음이 잘 되지 않았다.

“현장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와서 종이에다 뭐라고 적고 가겠지.”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말에는 맞장구를 쳐도 좋지 않고, 반대해도 좋지 않았다. 마사오는 공장에서 반장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반장님”이라고 불렀고, 새로 들어온 젊은 노동자들은 그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불량이 나면 마사오가 책임졌다. 납기가 밀리면 마사오가 남았다. 기계가 멈추면 마사오가 뛰었다.

그런데도 ‘본사’라는 말 앞에서는 늘 무언가가 작아졌다.

본사에서 오는 남자는 대개 젊었다. 양복이 깨끗했고, 손가락 끝에 기름때가 없었다. 그들은 “라인”이라는 말을 했지만 라인 옆에서 하루를 보낸 적은 없었다. 그들은 “생산성”이라고 말했고, 마사오는 “사람이 모자라다”고 말했다. 둘은 같은 회사를 말하고 있었지만, 같은 회사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도시락, 가방에 넣어뒀어요.”

“응.”

마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한 번 더 말했다.

“켄이치, 늦지 않게 보내.”

“알아요.”

문이 닫혔다.

사에코는 잠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검은 구두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시멘트 바닥, 벽에 걸린 아이의 노란 모자, 우산꽂이에 기대어 있는 접이식 우산.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제자리에 있는 것들을 보면 마음이 놓여야 하는데, 가끔은 그것들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부엌으로 돌아와 남은 된장국을 데웠다. 켄이치는 아직 이불 속에 있었다. 사에코는 방문을 열고 말했다.

“켄이치, 일어나야지.”

이불이 조금 움직였다.

“조금만.”

“조금만 하면 지각해.”

“엄마, 오늘 체육 있어?”

“있어. 어제 체육복 챙겨뒀잖아.”

켄이치가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아직 볼에 잠이 붙어 있었다. 사에코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아이는 하치오지에서 태어났다. 출생신고서에도 도쿄도 하치오지시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도쿄 아이다. 누가 뭐래도 도쿄 아이다.

사에코는 에치고에서 태어났다. 겨울이면 눈이 처마를 넘었고, 아침에는 손가락이 얼어 글씨를 쓰기 어려웠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그녀는 새 교복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채 취직열차를 탔다. 역에서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울면 사에코가 못 갈까 봐서였는지, 아니면 울 만큼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처음 본 것은 신주쿠도 긴자도 아니었다. 플랫폼에 늘어선 사람들, 이름표를 든 회사 사람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줄을 맞춰 걷는 아이들이었다. 자신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부터 사에코는 늘 누군가가 정한 곳으로 갔다.

고향에서는 부모가 정했다.

공장에서는 반장이 정했다.

결혼 뒤에는 남편의 회사가 정했다.

아이를 낳은 뒤에는 아이의 시간이 정했다.

그런데 켄이치는 달랐다. 켄이치는 처음부터 도쿄 아이였다. 이 아이는 어딘가로 보내지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어딘가로 가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엄마, 오늘 방과후 신청서 가져가는 날이래.”

켄이치가 밥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사에코의 손이 멈췄다.

“방과후?”

“응. 어제 프린트 줬잖아.”

그랬다. 가방에서 꺼내 식탁 위에 놓았던 종이가 있었다. 사에코는 어젯밤 그것을 대충 읽었다. 하지만 대충 읽었다는 건 사실 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글자는 읽었지만, 의미는 지나갔다.

피아노.

그림 교실.

영어 회화.

아동극.

바이올린 체험.

사에코는 밥주걱을 내려놓고 서랍에서 프린트를 꺼냈다. 종이는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뭐 하고 싶은데?”

켄이치는 된장국을 마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미즈노네 준이는 피아노 한대.”

사에코는 프린트의 ‘피아노’라는 글자를 보았다. 피아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 음악실에 있던 검은 물건, 라디오에서 들리는 음악, 결혼식장 한쪽에 놓여 있던 반짝이는 가구. 하지만 자기 아이가 피아노를 배운다는 일이 어떤 일인지 사에코는 몰랐다.

고향에서 아이들은 방과 후에 산으로 갔다. 눈이 오면 눈을 치웠고, 봄이면 밭일을 거들었다. 여자아이는 동생을 업었고, 남자아이는 장작을 날랐다. 정서교육이라는 말은 없었다. 정서는 자연히 생기는 것이거나,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

“준이가 한다고 너도 해야 하는 건 아니야.”

사에코는 그렇게 말했지만, 자기 목소리가 어딘가 불안하다는 것을 알았다.

켄이치는 금방 관심을 잃고 김을 밥에 싸 먹었다.

“영어는?”

“영어?”

“응. 영어도 있잖아.”

사에코는 대답하지 못했다.

영어. 앞으로는 필요하다고들 했다. 텔레비전에서도 말했다. 본사 사람들의 아이들은 아마 영어를 배울 것이다. 미즈노 부인은 이런 프린트를 보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시켜야 하는지, 무엇이 너무 빠른지, 무엇이 장래에 도움이 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사에코는 프린트를 다시 접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랑 다시 보자.”

“오늘 내야 한다니까.”

“그럼… 일단 비워둬. 선생님한테 엄마가 나중에 낸다고 해.”

켄이치가 입을 내밀었다.

“나만 안 내면 이상하잖아.”

그 말에 사에코는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나만. 이상하잖아.

그 두 마디 때문에 그녀는 결국 아침 설거지도 끝내지 못하고, 켄이치를 학교에 보낸 뒤 프린트를 들고 옆집으로 갔다.

미즈노 부인은 이미 빨래를 널고 있었다. 흰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이 깨끗했다. 사에코는 가끔 미즈노 부인의 손을 보았다. 손톱은 길지 않았지만 모양이 고르고, 손등에는 굳은살이 거의 없었다. 사에코의 손은 겨울이면 금이 갔고, 여름이면 세제에 벗겨졌다. 같은 주부의 손인데도, 출발점이 달랐다.

“어머, 사에코 씨.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이에요. 저기… 잠깐 여쭤봐도 돼요?”

“물론이죠.”

사에코는 프린트를 내밀었다.

“이거, 방과후 수업 말인데요. 어떤 걸 하면 좋을지 잘 몰라서.”

미즈노 부인은 프린트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아, 이거요. 처음 보면 좀 많죠?”

처음 보면.

사에코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즈노 부인은 악의가 없었다. 정말 친절했다. 그래서 더 난처했다. 악의가 있으면 마음속으로라도 화를 낼 수 있지만, 친절 앞에서는 자신의 무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피아노는 꼭 음악가가 되라는 게 아니에요. 손가락을 쓰면 머리에도 좋고, 발표회 경험도 생기고요. 요즘은 남자아이들도 많이 해요.”

“남자아이도요?”

“그럼요. 준이도 이번에 신청하려고요. 그리고 그림은 관찰력에 좋고, 영어는 아직 빠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는 필요하잖아요. 아동극은 발표력에 도움이 되고요.”

미즈노 부인은 프린트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하나씩 설명했다. 사에코는 열심히 들었다. 하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이 과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도쿄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었다.

도쿄의 아이들은 그냥 크지 않았다. 발표력을 길렀다. 관찰력을 길렀다. 정서를 길렀다. 앞으로 필요한 것을 미리 길렀다.

사에코는 자신이 자란 방식이 갑자기 허술한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치우고, 동생을 보고, 공장에 들어가고, 월급을 보내던 삶. 그 삶에는 발표력도 관찰력도 정서교육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살아왔다. 하지만 켄이치에게 그런 식으로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사에코 씨는 고향이 눈 많은 곳이라고 하셨죠?”

미즈노 부인이 말했다.

“네. 니가타 쪽이에요.”

사에코는 에치고라고 말하지 않았다. 에치고라고 말하면 너무 오래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이런 건 낯설 수도 있겠네요. 저도 처음 엄마가 됐을 땐 모르는 게 많았어요.”

“그러셨군요.”

사에코는 웃었다.

미즈노 부인의 말은 다정했다. 하지만 사에코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당신은 처음 온 사람이군요. 우리는 원래 알고 있었지만요.

그녀는 미즈노 부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프린트를 식탁 위에 펼쳤다. 피아노, 영어, 그림. 어느 것 하나 값이 싸지 않았다. 월謝가 적힌 칸을 보며 사에코는 마사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아마 말할 것이다.

“남자애가 무슨 피아노야.”

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 남아도나.”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말하기 어려웠다.

사에코는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프린트를 보았다. 창밖으로 사택단지의 베란다들이 보였다. 같은 높이, 같은 난간, 같은 빨래. 어디선가 아이가 리코더를 불었다. 음이 자꾸 틀렸다. 그 틀린 음이 이상하게 부러웠다. 저 아이의 집에는 누군가 리코더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

사에코는 연필을 들었다.

피아노 칸에 동그라미를 치려다 멈췄다. 영어 칸도 보았다. 그림 교실도 보았다. 어느 것이 켄이치에게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것이 도쿄 아이에게 필요한지도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그녀는 영어 회화에 작게 동그라미를 쳤다. 피아노보다 이유를 설명하기 쉬웠다. 앞으로 필요하니까.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까. 틀려도 덜 부끄러운 선택이었다.

오후가 되자 마사오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늦어.”

공장 사무실 전화라 그런지 목소리가 멀었다. 뒤에서 기계 소리가 들렸다.

“본사 사람들 때문에?”

“응. 보고서 다시 쓰래.”

마사오의 말끝이 거칠었다.

“현장에 와서 한 시간 보고 간 사람들이 뭘 안다고.”

“저녁은?”

“먼저 먹어.”

잠깐 침묵이 있었다. 사에코는 방과후 수업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소음이 너무 컸다. 마사오는 이미 지쳐 있었다. 지금 말하면 그는 짜증을 낼 것이고, 사에코는 상처를 받을 것이고, 결국 아무 결정도 나지 않을 것이다.

“알았어요. 조심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사에코는 한동안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마사오는 돈을 벌었다.

사에코는 그 돈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결정했다.

마사오는 피곤했다.

사에코도 피곤했다.

그런데 피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쪽은 언제나 마사오였다.

저녁에 켄이치가 돌아왔을 때, 사에코는 신청서를 가방에 넣어주었다.

“영어로 했어.”

“영어?”

“응. 앞으로는 필요하대.”

켄이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는 그 말이 그냥 어른들의 말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앞으로는 필요하다. 열심히 해야 한다. 늦으면 안 된다. 숙제해라. 밥 먹어라. 양치해라.

하지만 사에코에게는 그 말이 기도였다.

앞으로는 필요하다.

앞으로는 켄이치가 우리처럼 몰라서 묻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앞으로는 켄이치가 설명받는 쪽이 아니라 설명하는 쪽에 서야 한다.

밤 열 시가 넘어 마사오가 돌아왔다. 구두에 먼지가 묻어 있었고, 얼굴에는 기름 냄새와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사에코는 데워둔 밥과 된장국을 내놓았다.

“켄이치는?”

“잤어요.”

“공부는?”

“하고 잤어요.”

마사오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사에코는 맞은편에 앉지 않고 부엌 쪽에 서 있었다. 방과후 수업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월謝가 통장에서 빠져나갈 때쯤이면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다. 그때는 이미 시작한 뒤일 테니, 마사오도 크게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마사오가 밥을 반쯤 먹었을 때 말했다.

“오늘 본사에서 온 놈 있잖아.”

“그 사람 말투는 참 편하더라.”

“뭐가?”

“그냥… 회사가 자기 집 같은 말투.”

사에코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회사가 자기 집 같은 말투.

마사오에게 회사는 일터였다. 싸워야 하는 곳, 버텨야 하는 곳, 몸을 갈아 넣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본사 주임에게 회사는 자기 말이 통하는 곳이었다. 그것이 차이였다.

그날 밤, 사에코는 이불 속에서 켄이치의 숨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옆방에서 자고 있었다. 얇은 벽 너머로 작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사에코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켄이치는 도쿄 아이였다.

켄이치는 본사 사람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켄이치는 영어를 배울 것이다.

켄이치는 발표회에서 떨지 않을 것이다.

켄이치는 누군가에게 “처음 보면 어렵죠?”라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사에코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문득 고향의 눈 냄새가 떠올랐다. 젖은 짚 냄새, 언 손을 불어가며 역까지 걸어가던 아침, 어머니가 쥐여준 작은 보자기. 그 기억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부엌 바닥 바로 밑에 묻혀 있는 것 같았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곳으로 빠질 것 같았다.

사에코는 눈을 감았다.

오늘도 하나 배웠다. 엄마가 되기 위해서. 도쿄 아이의 엄마가 되기 위해서.

2장. 서로 못 들은 걸로 하지

사에코가 마사오를 처음 본 것은 공장 식당이 아니라, 기숙사 뒤편 세탁장 앞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하치오지의 비는 고향의 눈보다 차갑지 않았지만, 사에코에게는 더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눈은 쌓이면 길을 막는다. 그래도 눈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다. 하늘이 낮아지고, 바람이 돌고, 마을 어른들이 말없이 삽을 꺼내면 곧 내린다.

도쿄의 비는 달랐다. 어느 틈에 옷 속으로 스며들고, 머리카락을 뺨에 달라붙게 하고, 신발 밑창에서 검은 흙냄새를 끌어올렸다. 빗물이 공장 담벼락을 타고 내려오면, 그것은 물이라기보다 기름을 조금 섞은 도시의 체액 같았다.

사에코는 작업복을 빨다 말고 수도꼭지 앞에 서 있었다. 고무장갑이 찢어져 오른손 검지 끝이 붉었다. 옆 세탁통에는 같은 방 언니들의 작업복이 함께 담겨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자기 옷만 빠는 날이 드물었다. 손이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 것을 조금씩 대신했고, 늦게 온 아이는 먼저 온 아이에게 부탁했고, 부탁은 곧 빚이 되었다.

“그거, 그렇게 비틀면 단추 떨어져.”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사에코는 돌아보았다. 젖은 작업모를 손에 든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얼굴은 아직 소년처럼 말랐다. 하지만 눈 밑에는 벌써 어른의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작업복 소매에는 금속가루가 묻어 있었고, 손톱 사이에는 검은 기름때가 끼어 있었다.

“알아요.”

사에코는 짧게 대답했다.

그 순간 남자가 조금 웃었다.

“에치고 쪽?”

사에코의 손이 멈췄다.

“왜요?”

“말끝이.”

그 말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도쿄에 온 뒤, 사에코가 가장 먼저 미워하게 된 것은 자기 말끝이었다. 손이 거친 것도, 머리가 촌스러운 것도, 기숙사 방에서 편지를 읽다가 우는 것도 아니었다. 말끝이었다. 아무리 입술을 다물고 조심해도, 피곤하거나 놀라면 고향이 새어나왔다. 고향은 몸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에 혀끝으로 올라왔다.

사에코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아키타죠.”

이번에는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에코는 조금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잠시 빗소리만 들었다. 함석지붕 위로 빗물이 쏟아졌고, 멀리 공장 쪽에서는 교대 종이 울렸다. 여자 기숙사 건물 창문마다 빨래가 축축하게 매달려 있었다. 남자 기숙사 쪽 담배 피우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가 먼저 말했다.

“서로 못 들은 걸로 하지.”

사에코는 그를 보았다.

“뭘요?”

“방금 말끝.”

그는 자기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 것도, 내 것도.”

사에코는 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웃고 말았다. 이상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약점을 알아본 순간인데, 모욕당했다는 느낌보다 안심이 먼저 왔다.

그날 이후 둘은 가끔 세탁장이나 공장 뒤 담배 피우는 곳 근처에서 마주쳤다.

사에코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식당보다 조용한 그늘이 있었다. 마사오도 담배를 피우는 날보다 피우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는 담배를 손에 들고 있다가 불도 붙이지 않은 채 버리곤 했다. 버리기 전까지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어른 같아서, 사에코는 그것이 조금 우습고 조금 애처로웠다.

그가 마사오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 뒤였다. 공장 게시판에 교대조 명단이 붙었고, 누군가 그를 “사토”라고 불렀다. 사토 마사오. 아키타 출신. 중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봄에 취직열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사에코보다 한 살 위였다.

사에코는 에치고 출신이었다. 하지만 도쿄에 와서는 “니가타 쪽”이라고만 말했다. 에치고라고 말하면 너무 오래된 사람처럼 들렸다. 눈과 쌀과 사투리와 농가의 부엌이 한꺼번에 따라오는 이름이었다. 니가타 쪽이라고 말하면 지도가 되고, 에치고라고 말하면 피가 되었다.

둘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잔업?”

“응.”

“고향에 돈 보냈어?”

“보냈어.”

“얼마?”

“말하면 뭐해.”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이상하게 편했다.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꾸 앞으로의 이야기를 했다. 기술을 배우면 월급이 오른다. 야간학교에 가면 사무직도 가능하다. 도쿄는 노력하면 길이 있다. 여자는 빨리 좋은 사람 만나야 한다. 그런 말들은 모두 맞는 말처럼 들렸지만, 들을수록 몸이 지쳤다.

마사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에코도 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에게 꿈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그날 들키지 않도록 서로를 가려주었다.

한 번은 식당에서였다.

사에코가 배식대를 정리하다가 뒤에 선 아이에게 “그거 치워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피곤한 탓에 고향 말투가 먼저 올라왔다. 말끝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마사오가 저쪽에서 일부러 물컵을 떨어뜨렸다. 금속컵이 바닥에 부딪혀 크게 굴렀다. 모두가 그쪽을 보았다. 사에코는 입을 다물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마사오가 조례를 맡은 날이었다.

반장 보조가 되어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전달사항을 읽었다. 그는 종이를 들고 서 있었지만 손이 조금 떨렸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러나 “금일 오후부터”라고 말해야 할 대목에서 말끝이 무너졌다. 누군가 뒤에서 작게 웃었다. 남자들 사이의 웃음은 칼처럼 짧았다.

사에코는 배식대 앞에서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오늘 반찬 모자라요. 뒤에 사람들 먼저 줄 서세요.”

웃음은 그쪽으로 옮겨갔다. 마사오는 조례를 마저 끝냈다.

그날 저녁, 그는 기숙사 뒤편에서 사에코에게 커피우유를 하나 건넸다.

“고맙다.”

“뭐가요?”

“아침.”

사에코는 병뚜껑을 손톱으로 긁었다. 잘 열리지 않았다. 마사오가 손을 내밀었지만, 사에코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자기 손으로 열었다. 뚜껑이 빠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나도 전에 빚졌으니까요.”

“그럼 갚은 거네.”

“아직 남았어요.”

“얼마나?”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사오도 더 묻지 않았다.

그때부터 둘 사이에는 빚이 쌓였다. 돈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부끄러움을 가려준 빚. 울고 싶은 얼굴을 못 본 척해준 빚.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고 난 뒤 눈이 붉어진 것을 묻지 않은 빚. 월급날 송금 봉투가 두꺼운지 얇은지 보지 않은 척해준 빚.

사에코는 나중에야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처음부터 가슴이 뛴 것은 아니었다. 마사오를 보면 설렌다기보다,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이 사람 앞에서는 완벽한 도쿄 말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도, 그것을 무기로 쓰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었다.

마사오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는 사에코 앞에서만 가끔 아키타 말을 했다. 아주 짧게, 피곤할 때, 화가 났을 때, 술이 조금 들어갔을 때. 그러고는 바로 표준어로 고쳤다. 사에코는 못 들은 척했다.

그것이 둘 사이의 다정함이었다.

청춘영화에 나오는 연애처럼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둘 다 쉬는 날이 맞지 않았고, 맞아도 잠이 부족했다. 월급이 나온 주말에 한 번 신주쿠에 간 적은 있었다. 여자 기숙사 방장 언니가 “도쿄에 왔으면 신주쿠 정도는 가봐야지”라고 했기 때문이다.

역은 너무 컸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고 걷는 것 같았다. 사에코와 마사오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전광판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지하도는 끝이 없었고, 간판은 너무 밝았고, 양복 입은 남자들은 어깨를 부딪쳐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에코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작은 것이 아니라, 투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사오가 말했다.

“여긴 사람이 사는 데가 아니네.”

사에코는 웃었다.

“그래도 도쿄잖아요.”

“하치오지도 도쿄야.”

마사오가 말했다.

그 말에 사에코는 이상하게 기뻤다. 하치오지도 도쿄. 그 말은 위로 같았다. 둘이 서 있는 곳이 중심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도 위에서는 도쿄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둘은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마사오는 꾸벅꾸벅 졸았다. 사에코는 창문에 비친 둘의 얼굴을 보았다. 작업복은 아니었지만, 도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둘이 함께 비쳐 있으니 혼자일 때보다 덜 초라했다.

그해 겨울, 공장에 새 기계가 들어왔다.

라인이 바뀌고, 잔업이 늘고, 기숙사 방 배치도 흔들렸다. 여자 기숙사에서는 결혼해서 나가는 사람이 하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하나, 다른 공장으로 옮기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에코와 같은 방을 쓰던 언니 하나도 결혼해 나갔다. 남은 침대 위에는 접힌 담요와 먼지 냄새만 남았다.

사에코는 그 빈자리를 보며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이곳을 나가야 한다.

기숙사는 잠을 재워주는 곳이었다. 밥을 먹여주는 곳이었다. 아프면 누군가 약을 나눠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었다. 오래 있으면, 사람이 기숙사 물건처럼 되었다. 침대 번호와 사물함 번호와 출근표 이름으로만 남았다.

그날 저녁 마사오가 말했다.

“기숙사, 오래 있을 곳은 아니지.”

사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오래 있을 곳은 아니에요.”

“그럼 같이 나갈래?”

사에코는 처음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마사오는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결혼하면 사택 신청할 수 있어.”

그것은 청혼이었다.

꽃도 없고, 반지도 없고, 사랑한다는 말도 없었다. 대신 사택 신청서와 배급되는 생활용품과 둘이 합치면 조금 나아질 월급 계산이 있었다.

사에코는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사택 신청할 수 있다”는 말은 믿을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둘이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증거였다.

“나랑 결혼하면 힘들 텐데요.”

사에코가 말했다.

“누구랑 해도 힘들어.”

마사오가 대답했다.

“나는 고향 말 나와요.”

“나도 나와.”

“많이 배운 여자도 아니고.”

“나도 많이 배운 남자 아니야.”

“친정에 돈도 보내야 하고.”

“나도 보내.”

둘은 잠시 서로를 보았다.

마사오가 말했다.

“그러니까 서로 알잖아.”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서로 알잖아.

그것은 사랑한다보다 사에코에게 더 깊이 들어왔다. 사랑은 언젠가 변할 수 있지만, 서로 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 무엇을 부끄러워하는지 안다. 무엇을 숨기고 싶은지 안다. 그리고 자신도 이 사람의 그것을 안다.

둘은 서로의 약점을 가려줄 수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결혼식은 작았다. 회사 근처 식당의 2층 방을 빌렸다. 다다미는 조금 낡았고, 벽에는 색이 바랜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고향에서 온 부모들은 서로의 말을 반쯤 알아듣지 못했다. 에치고 말과 아키타 말이 작은 방 안에서 부딪혔다. 회사 사람들은 축하한다고 말했고, 사에코는 표준어로 고맙다고 했다. 마사오도 표준어로 인사했다.

둘은 그날만큼은 고향을 양쪽 부모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도쿄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사에코의 어머니는 밥상 끝에서 조용히 말했다.

“고생해도 참아라.”

그 말은 축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어머니들이 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마사오의 아버지는 술이 조금 들어가자 아키타 말로 길게 무언가를 말했다. 마사오는 얼굴을 붉히며 “됐어요, 아버지”라고 말렸다. 사에코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뜻은 알 것 같았다. 잘 살아라. 남자가 책임져야 한다. 고향 망신시키지 마라. 그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결혼식이 끝나고, 둘은 사택 방으로 돌아왔다.

방은 좁았다. 새 이불 냄새가 났고, 구석에는 아직 풀지 않은 짐이 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공장의 불빛이 보였다. 멀리서 기계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퇴근 후에도 따라오는 소리가 되었다.

사에코는 방 한가운데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이것은 사랑일까.

마사오는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창가에 앉았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사에코는 대답했다.

“해야죠.”

해야죠.

그 말은 신혼 첫날의 말로는 조금 딱딱했다. 하지만 둘에게는 그보다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해야죠. 행복해지자는 말 대신, 들키지 말고 버텨요. 당신이 내 약점을 가려주면, 나도 당신의 약점을 가려줄게요.

그렇게 둘은 부부가 되었다.

사에코는 그 뒤로 자주 생각했다. 자신이 마사오를 사랑했는지, 아니면 마사오 앞에서 덜 부끄러웠던 것을 사랑이라 착각했는지. 하지만 그 질문은 언제나 오래가지 못했다. 밥물이 끓었고, 세탁물이 쌓였고, 마사오의 도시락을 싸야 했고, 월급날이면 송금 봉투를 준비해야 했다.

사랑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사에코에게 결혼은 감정보다 먼저 피난처였다. 그리고 피난처는 때로 사랑보다 절실했다.

사택 생활은 처음에는 기숙사보다 넓게 느껴졌다.

자기 부엌이 있었다. 작지만 식탁이 있었고, 찬장도 있었다. 빨래를 자기 베란다에 널 수 있었다. 누군가의 양말과 자기 속옷이 같은 줄에 매달리지 않았다. 밤에 울어도 같은 방 언니가 돌아눕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에코는 사택이 기숙사와 아주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숙사에서는 방장이 있었다. 사택에는 이웃이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출근표가 있었다. 사택에는 남편의 직급과 부서가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누가 고향에 얼마를 보내는지 다들 짐작했다. 사택에서는 누가 본사 사람인지, 누가 공장 사람인지, 누가 사택을 빨리 나가 자기 집을 살 수 있을지 다들 짐작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남편분은 어느 쪽이에요?”

처음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사에코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느 쪽이라니요?”

“본사? 공장?”

그제야 알았다. 같은 회사라도 같은 회사가 아니었다.

마사오는 공장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에코도 공장 사람의 아내였다.

그 말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마사오는 성실했고, 곧 반장 보조에서 반장이 되었다. 현장에서 그는 누구보다 믿음직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을 가르쳤고, 기계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이상한지 알아챘다. 불량률이 떨어지면 관리자가 그를 불렀고,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

하지만 사택단지 안에서는 본사라는 말이 이상한 빛을 냈다.

본사 사원의 아내들은 공장 사원의 아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웃었다. 같은 슈퍼에서 장을 보고, 같은 목욕탕 이야기를 하고, 같은 단지 회보를 돌렸다. 그런데 말투가 달랐다. 아이들 교육 이야기가 달랐다. 남편의 귀가 시간이 달랐다. 무엇보다 그들은 회사의 중심을 멀리서가 아니라 가까이서 알고 있는 듯했다.

그중 옆집 미즈노 부인은 유난히 친절했다.

미즈노 부인은 도쿄 태생이었다. 친정은 스기나미라고 했다. 사에코는 스기나미가 어디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이름만으로도 부드러웠다. 미즈노 부인은 말을 천천히 했고, 모르는 것을 설명할 때도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사에코는 더 자주 무안해졌다.

“사에코 씨, 이건 이렇게 하면 편해요.”

“사에코 씨, 이 신청서는 여기 도장 찍으면 돼요.”

“사에코 씨, 유치원은 빨리 알아보셔야 해요. 좋은 데는 금방 차거든요.”

그녀는 정말 도와주었다. 악의가 없었다. 그 악의 없음이 때때로 사에코의 가슴을 찔렀다.

어느 봄날, 미즈노 부인이 말했다.

“아이들은 좋겠어요. 도쿄 아이로 자라서. 하치오지도 도쿄니까요.”

사에코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그날 밤, 그녀는 마사오에게 말했다.

“우리 아이는 도쿄 태생이야.”

마사오는 신문을 접으며 웃었다.

“아직 아이도 없는데 무슨.”

“나중에 생기면.”

“하치오지는 에도는 아니지.”

사에코는 조금 화가 났다.

“그래도 도쿄야.”

마사오는 그녀를 보다가, 더 말하지 않았다. 아마 웃으려다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에코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지도상으로라도 도쿄라는 것. 출생신고서에 도쿄도라고 적힌다는 것. 그것이 언젠가 아이에게 방패가 되어줄 것 같았다.

얼마 뒤 사에코는 임신했다.

입덧은 심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고향 음식이 생각났다. 절인 무, 눈 속에 묻어두던 배추, 어머니가 끓이던 된장국. 하지만 사에코는 그것들을 만들지 않았다. 마사오도 아키타 음식을 찾지 않았다. 둘은 둘 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식탁에서는 고향을 줄였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마사오는 병원 복도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

“아들이래요.”

간호사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사에코는 침대에 누워 그 얼굴을 보았다. 마사오는 울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말했다.

“도쿄에서 태어났네.”

그 말끝에 아키타가 묻어 있었다. 사에코는 못 들은 척했다.

아들의 이름은 켄이치가 되었다.

켄이치는 잘 울었고, 잘 먹었고, 잘 아팠다. 사에코는 밤마다 아이의 열을 재고, 마사오는 새벽에 출근했다. 마사오는 아이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서툴게 쓰다듬었고, 울면 당황했고, 기저귀를 갈 때마다 허둥거렸다.

사에코는 아이를 안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우리보다 나아야 한다.

그 생각은 사랑보다 먼저 왔다. 혹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켄이치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 사에코는 집에서 더욱 조심했다. 고향 말이 나오지 않게 했다. 마사오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때때로 말수가 줄었다. 하고 싶은 말을 표준어로 고르는 동안, 말할 필요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켄이치가 물었다.

“엄마, 엄마는 어디서 태어났어?”

사에코는 잠시 멈췄다.

“니가타 쪽.”

“눈 많이 와?”

“응. 많이 와.”

“가보고 싶다.”

사에코는 웃었다.

“언젠가.”

하지만 그 언젠가는 자주 오지 않았다. 고향에 가면 사투리가 돌아왔다. 부모의 낡은 집, 남동생의 무심한 말투, 친척들의 시선, “도쿄는 좋겠네”라는 말들이 사에코를 다시 원래 자리로 끌어내렸다. 그녀는 켄이치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켄이치에게 고향은 여름방학의 여행지 정도면 충분했다. 부모의 출발점이 아니라, 풍경이면 충분했다.

마사오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그는 아키타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술이 들어가면 가끔 “눈이 허리까지 왔지”라고 말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켄이치가 “아빠 이상한 말 해”라고 웃은 뒤부터는 더 조심했다.

그 웃음은 아이의 웃음이었다.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사에코는 그날 밤 마사오가 화장실에서 오래 나오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마사오는 집에서도 회사 말투를 썼다.

“그건 나중에 확인하자.”

“일단 보류.”

“문제없어.”

사에코는 그 말투가 싫지 않았다. 그것은 마사오가 살아남기 위해 입은 작업복 같은 것이었다. 자신도 앞치마를 두르고, 표준어를 두르고, 도쿄 아이의 엄마라는 얼굴을 두르고 살았다.

부부란 서로의 맨몸을 보는 사람들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사에코와 마사오는 오히려 서로가 입은 것들을 벗기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서로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약점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켄이치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방과후 수업 신청서를 가져오고, 사에코가 미즈노 부인에게 피아노와 영어의 차이를 물어보던 그 봄날까지도, 사에코는 그렇게 믿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

마사오는 반장이 되었고, 사에코는 단지의 주부가 되었고, 켄이치는 도쿄 아이가 되었다. 비록 하치오지였지만, 그래도 도쿄였다. 지도 위에서 도쿄였고, 출생신고서에서 도쿄였고, 사에코의 마음속에서는 무엇보다 도쿄였다.

그날 밤, 마사오가 본사 주임 이야기를 하며 말했다.

“그 사람 말투는 참 편하더라.”

“뭐가?”

“그냥… 회사가 자기 집 같은 말투.”

사에코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회사가 자기 집 같은 말투.

마사오에게 회사는 견디는 곳이었다. 사에코에게 도쿄는 배워야 하는 곳이었다. 둘 다 그곳의 사람이 되려고 애썼지만, 어딘가에서 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에코는 잠든 켄이치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켄이치는 달라야 한다.

켄이치는 회사가 자기 집 같은 말투를 가질 것이다.

켄이치는 학교가 자기 집 같은 걸음을 가질 것이다.

켄이치는 도쿄가 자기 것인 사람처럼 살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신과 마사오가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며 시작한 이 결혼도 틀리지 않은 것이 된다.

사에코는 그렇게 믿었다.

믿어야 했다.

3장. 고등학교라는 말

켄이치가 사립고등학교 이름을 말했을 때, 마사오는 밥상 앞에서 한동안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담임이 말했어.”

켄이치는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사에코는 그 얼굴을 보며, 아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자기 안에 방을 따로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어릴 때는 속마음이 전부 얼굴에 나왔다. 배고프면 배고픈 얼굴, 졸리면 졸린 얼굴, 서운하면 서운한 얼굴.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켄이치는 말하기 전에 생각했고, 생각한 것 중 일부만 내놓았다.

“그 학교라면 대학도 잘 간대.”

켄이치가 덧붙였다.

마사오는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고등학교는 그냥 가까운 데 가도 되는 거 아니냐.”

켄이치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반항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었다. 설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재는 눈빛이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사에코는 된장국 그릇을 옮기던 손을 멈췄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모른다. 어머니도 모른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라는 길의 입구가 어디인지도, 그 안에서 무엇이 갈라지는지도 모른다.

사에코는 정말 몰랐다.

그녀에게 고등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다. 타지 못한 열차의 반대편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봄, 그녀에게는 교복이 아니라 작업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과서가 아니라 월급봉투가 있었고, 입학식이 아니라 취직열차가 있었다. 고향 역에서 어머니는 “가서 폐 끼치지 마라”고 했고, 아버지는 담배만 피웠다. 누구도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 거냐”고 묻지 않았다.

마사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키타의 눈 녹은 길을 지나 역으로 가던 열다섯 살의 마사오에게도 고등학교는 없었다.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앞에는 놓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아들이 밥상 앞에서 고등학교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은 사에코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서였는지, 학원 광고에서였는지, 미즈노 부인의 입에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무나 가는 곳은 아니었다.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가 혼자 바라보게 된 문이었다.

마사오는 물었다.

“학비는?”

켄이치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비싸긴 한데… 장학금도 있고.”

“장학금?”

“성적 좋으면.”

마사오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장학금이라는 말은 희망처럼 들리면서도, 가난을 들킨 것처럼 들렸다. 사에코는 그 말을 싫어했다. 하지만 싫어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담임이 뭐라고 했는데?”

사에코가 물었다.

켄이치는 어머니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

“노려볼 수 있대. 지금부터 하면.”

지금부터 하면.

사에코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지금부터 하면. 이 말은 늘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지금부터 표준어를 조심하면. 지금부터 돈을 모으면. 지금부터 아이를 잘 키우면. 지금부터 고향을 덜 보이면. 지금부터 무언가를 참으면.

그러면 언젠가는.

그 언젠가가 늘 다음 문 앞에 서 있었다.

마사오는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는 솔직히 말했다.

“학교 이름도 모르고, 뭐가 좋은지도 몰라.”

켄이치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사에코는 그것을 보았다. 마사오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가고 싶으면 해봐.”

켄이치가 눈을 들었다.

“진짜?”

“돈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 말이 나오자, 사에코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었다. 또 그 말이었다. 돈은 내가. 공부 쪽은 당신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놓인 선은 늘 친절한 얼굴로 그어졌다.

마사오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학교나 시험 같은 건 당신이 알아봐줘. 나는 그런 거 모르니까.”

사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 대답은 익숙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면 일이 자기 앞으로 온다. 프린트, 설명회, 담임 면담, 학원비, 도시락, 감기약, 밤의 우동, 아침의 깨우기, 모의고사 날짜, 교복 치수, 아이의 짜증, 남편의 피로. 모두 하나씩 그녀 앞으로 온다.

켄이치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이는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사오는 부담을 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에코는 그 둘 사이에서, 아무도 이름 붙이지 않은 일을 맡았다.

그날 밤, 마사오는 담배를 물고 베란다에 섰다. 사택단지의 불빛은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같은 크기의 창, 같은 색의 커튼, 같은 시간에 켜지고 꺼지는 방들. 그러나 그 안의 사정은 모두 달랐다. 어느 집은 본사 사원, 어느 집은 공장 사원, 어느 집은 설비과, 어느 집은 총무부. 여자들은 쓰레기장에서 그것을 다 알았다.

“고등학교라.”

마사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사에코는 빨래를 개며 대답했다.

“네.”

“나한테는 멀다.”

“나한테도요.”

마사오는 담배 연기를 밖으로 내뱉었다.

“켄이치는 멀리 가겠네.”

그 말에 사에코는 빨래를 개던 손을 멈췄다. 멀리 간다는 말은 좋은 말이어야 했다. 둘이 바라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야죠.”

그녀는 말했다.

마사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야지.”

며칠 뒤, 사에코는 고등학교 설명회에 갔다.

학교는 전철을 두 번 갈아타야 했다. 하치오지에서 출발해 점점 도심 쪽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의 옷차림과 말투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사에코는 검은색 손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았다. 가방 안에는 켄이치의 성적표 사본, 필기도구, 손수건, 그리고 혹시 몰라 챙긴 작은 봉투가 들어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다른 어머니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알고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남편과 함께 왔고,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왔다. 사에코는 혼자였다. 혼자인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혼자라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강당에서 교감이 말했다.

“본교는 자율과 책임을 중시합니다.”

사에코는 받아 적었다.

자율.

책임.

그 말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것을 배워온 사람들을 위한 말 같았다. 사에코에게 책임은 맡겨지는 것이었고, 자율은 허락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이들이 그것을 배운다고 했다.

다음으로 진학 실적이 설명되었다. 대학 이름들이 스크린에 떴다. 사에코는 읽을 수 있는 이름과 읽어도 의미를 모르는 이름을 구분하지 못했다. 주변 어머니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은 소리로 남편과 이야기했다. 사에코도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회가 끝나고, 옆에 앉았던 여자가 말을 걸었다.

“어느 중학교세요?”

사에코는 중학교 이름을 말했다.

“아, 하치오지 쪽이세요?”

“네.”

“통학은 좀 걸리겠네요.”

“그래도 아이가 원해서요.”

여자는 미소 지었다.

“아이가 원하면 부모가 도와줘야죠.”

말은 다정했다. 그러나 사에코는 그 말이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아이가 원하면 부모가 도와준다. 얼마나 깨끗한 문장인가. 그 문장 안에는 통장 잔액도, 잔업도, 중졸이라는 침묵도, 고향으로 보낸 송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에코는 역 앞 서점에서 고교입시 안내서를 샀다. 책값은 비쌌다. 계산대에 올리기 전 잠시 망설였지만, 내려놓지 않았다. 표지에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 벚꽃 아래에서 웃고 있었다. 켄이치와 닮지는 않았지만, 사에코는 그 웃음을 한참 보았다.

그날 저녁, 마사오는 평소보다 늦었다.

“잔업 늘렸어요?”

사에코가 물었다.

“응.”

마사오는 손을 씻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몸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이 집에서 가장 자주 쓰는 거짓말이었다. 사에코도 자주 썼고, 마사오도 자주 썼다.

그는 밥상 앞에 앉아 고교입시 안내서를 보았다. 몇 페이지를 넘기더니 곧 덮었다.

“봐도 모르겠네.”

“나도요.”

사에코가 말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보았다. 모른다는 말이 이렇게 편한 적은 오래간만이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은 금방 지나갔다. 모른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음 주부터 켄이치의 생활이 바뀌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갔고, 집에 돌아오면 책상 앞에 앉았다. 사에코는 밤마다 야식을 만들었다. 우동, 주먹밥, 따뜻한 차, 때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는 아이에게 억지로 귤을 까주었다. 켄이치가 문제집을 던진 날도 있었다.

“엄마는 모르잖아!”

그는 그렇게 소리쳤다.

사에코는 조용히 주웠다. 구겨진 페이지를 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알아야지.”

켄이치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사에코는 울지 않았다. 울면 눈이 붓고, 아침에 켄이치가 볼 것이다. 대신 쌀을 씻었다. 손가락 사이로 흰 물이 흘렀다. 그녀는 그 물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모른다. 그래서 너를 보내는 것이다.

입시 준비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동 오오타니 미치코가 찾아왔다.

미치코는 마사오와 같은 아키타 출신이었다. 같은 마을은 아니었지만, 사택단지에서는 그 정도로도 충분히 동향이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미치코는 사에코에게 말린 산나물을 나눠주었다.

“사토 씨 좋아하실 거예요. 아키타 사람은 이런 거 보면 그냥 못 지나가니까.”

미치코는 밝았다. 밝지만 어딘가 쉽게 지치는 사람이었다. 웃을 때는 크게 웃었고, 말을 할 때는 아키타 억양이 자주 나왔다. 사에코가 표준어를 고르느라 잠시 멈출 때, 미치코는 이미 말하고 있었다. 그런 점이 부럽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마사오는 미치코 앞에서 가끔 말이 풀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쓰레기장 앞에서, 단지 청소 날에, 미치코가 “그 말 아키타에서는 이렇게 하잖아요?” 하고 웃으면 마사오도 웃었다. 말끝이 낮아졌다. 사에코는 그 순간을 들었다.

질투라고 말하기에는 이상했다. 마사오와 미치코 사이에 남녀의 기척은 없었다. 그러나 사에코는 미치코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미치코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에코는 마사오의 아내였다. 그러나 미치코는 마사오의 고향을 알고 있었다.

그날 미치코는 작은 봉지를 들고 왔다.

“이거, 고향에서 온 거예요. 많아서.”

안에는 말린 산나물이 들어 있었다.

“고마워요.”

사에코는 봉지를 받았다.

미치코는 현관 앞에서 집 안을 슬쩍 보았다. 식탁 위에는 켄이치의 문제집이 쌓여 있었다.

“켄이치 군, 공부 많이 하나 봐요.”

“고등학교 시험 준비요.”

“좋겠어요.”

미치코가 말했다.

“뭐가요?”

“공부 잘하는 애는 길이 있잖아요. 우리 애는 영…”

그녀는 말을 흐렸다. 미치코에게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었다. 둘 다 아직 어렸고, 단지 놀이터에서 자주 뛰어다녔다.

사에코는 겸손하게 웃었다.

“아직 몰라요.”

미치코는 잠시 사에코를 보았다. 평소와 달리 웃지 않았다.

“몰라야 좋은 것도 있어요.”

사에코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아니에요.”

미치코는 곧 웃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그녀가 돌아간 뒤, 사에코는 봉지를 찬장에 넣었다. 산나물 냄새가 살짝 올라왔다. 고향과 닮았지만 고향은 아닌 냄새였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단지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쓰레기장 앞에서였다. 사에코가 빈 병을 분리하고 있는데, 뒷동의 이노우에 부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들었어요? 앞동 오오타니 씨.”

누군가 바로 대답했다.

“그 운전학원?”

사에코는 병을 내려놓던 손을 멈췄다.

“운전학원?”

이노우에 부인이 사에코를 보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오오타니 부인, 운전 배우러 다녔잖아요. 거기 강사하고…”

말끝은 흐려졌지만, 필요한 말은 다 나왔다.

다른 부인이 혀를 찼다.

“아이도 둘이나 있는데.”

“남편분 불쌍해서 어떡해.”

“겉보기엔 그렇게 얌전하던 사람이.”

“그러게요. 사람 속은 몰라.”

사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이도 있는데. 남편도 있는데. 같은 단지에 살면서. 그런 말을 해야 옳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운전학원.

사에코는 그 단어에 걸렸다. 미치코가 몇 달 전 운전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면허 있으면 좋잖아요. 애들 데리고 병원 갈 때도 그렇고.”

그때 어느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남편분이 태워주면 되잖아요.”

미치코는 같이 웃었지만, 사에코는 그 웃음이 조금 늦게 나온 것을 보았다.

이제 단지 사람들은 말했다.

“운전 같은 걸 배우러 다니더니 결국 저렇게 됐대.”

그 말이 이상했다. 운전을 배우는 것과 남자를 만나는 것이 어떻게 한 문장이 되는지 사에코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 아무렇지 않게 연결했다. 여자가 혼자 이동하는 법을 배우면, 집 밖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집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집을 나간다.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순서인 듯했다.

그날 저녁, 마사오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오오타니 집 얘기 들었어?”

사에코는 젓가락을 놓았다.

“들었어요.”

마사오는 얼굴을 찌푸렸다.

“망신스럽게.”

그 말은 사에코가 예상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듣기 싫었다.

“그 사람, 당신하고 같은 아키타였죠?”

마사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같은 아키타라고 다 같은 사람은 아니야.”

“그렇죠.”

“애도 있는데 무슨 짓이야.”

사에코는 말하지 않았다.

마사오는 더 세게 말했다.

“남편도 회사 다니는데. 같은 사택에서. 생각이 있으면…”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사에코는 그가 화가 났다기보다 불안해한다는 것을 느꼈다. 미치코가 단지의 규칙을 어긴 것은 단지 한 여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참고 버티며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마사오는 자신과 사에코가 믿어온 길을 지키고 싶어 했다.

참고, 일하고, 송금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을 사고, 말끝을 고치고, 고향을 줄이고, 언젠가 아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

미치코는 그 길에서 벗어났다. 아니, 벗어났다고들 말했다.

사에코는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갔대요?”

“몰라.”

마사오가 짧게 말했다.

“알고 싶지도 않아.”

사에코는 더 묻지 않았다.

그날 밤, 켄이치가 공부하는 방에 우동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좀 먹고 해.”

“나중에.”

“식어.”

“알았어.”

켄이치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사에코는 쟁반을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기 전, 책상 위에 놓인 학교 안내서가 보였다. 그곳에는 켄이치가 가고 싶어 하는 고등학교 사진이 있었다. 넓은 운동장, 반듯한 교사, 웃고 있는 학생들.

그 사진 속 아이들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사에코는 부엌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했다. 물소리 속에서 문득 생각했다.

미치코는 정말 남자를 따라간 걸까. 아니면 그냥 집에서 나간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그녀는 수도꼭지를 더 세게 틀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다. 켄이치의 시험이 있었다. 마사오의 잔업이 있었다. 등록금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앞동 오오타니 집은 며칠 동안 조용했다.

빨래가 널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친척집으로 갔다는 말이 돌았다. 남편은 며칠씩 보이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은 오오타니 미치코라는 이름을 점점 쓰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오타니 부인”이었고, 곧 “앞동 그 사람”이 되었다.

여자는 집을 나가면 이름부터 잃는구나.

사에코는 생각했다.

집에 남아 있어도 이름은 없었는데.

입시일이 가까워졌다.

사에코는 미치코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켄이치의 아침 체온을 보고, 도시락 반찬을 정하고, 학원비 봉투를 챙기고, 마사오의 작업복을 빨았다. 마사오는 계속 잔업을 했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토요일에 가요.”

“토요일도 출근.”

“그럼 언제 가요?”

“괜찮아.”

괜찮다.

사에코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모두 괜찮았다. 마사오도 괜찮고, 켄이치도 괜찮고, 사에코도 괜찮았다. 괜찮지 않은 사람은 집을 나간 사람뿐이었다.

시험 당일 아침, 사에코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밥은 너무 질어도 안 되고, 너무 딱딱해도 안 되었다. 달걀말이는 단맛을 조금 줄였고, 튀김은 넣지 않았다. 긴장하면 속이 불편할까 봐서였다. 보온병에는 따뜻한 차를 담았다.

켄이치는 교복을 입고 식탁에 앉았다. 얼굴이 창백했다.

“괜찮아?”

“응.”

마사오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공장에 가야 했지만, 역까지 같이 가겠다고 했다. 세 사람은 아직 어두운 길을 걸었다. 사택단지의 창문 몇 개에 불이 켜져 있었다. 다른 집 아이들도 어디론가 시험을 보러 가는지,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앞동 오오타니 집은 어두웠다.

사에코는 그 창문을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보았다. 커튼이 닫혀 있었고, 베란다에는 빈 빨래집게만 매달려 있었다.

역 앞에서 마사오는 켄이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긴장하지 마.”

켄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에코는 목도리를 고쳐주었다.

“문제 끝까지 읽고.”

“알아.”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고.”

“알아.”

“모르면 일단 넘어가고.”

“안다고.”

켄이치가 조금 짜증을 냈다. 사에코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 뒤돌아보더니 손을 작게 흔들었다.

마사오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 녀석, 많이 컸네.”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가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켄이치가 자신을 떠나고 있다.

아직 중학생인데도, 이미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에코가 보낼 수는 있지만, 따라갈 수는 없는 곳. 고등학교, 대학, 본사, 도쿄의 말투. 그 모든 것이 저 계단 아래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합격 발표일, 사에코는 혼자 갔다.

마사오는 공장을 빠질 수 없었다. 켄이치는 학교에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부모들이 모여 있었다. 사에코는 게시판 앞으로 다가가 번호를 찾았다. 손에 들고 있던 수험표가 젖었다. 땀이었다.

번호가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다시 보았다. 있었다. 또 보았다. 여전히 있었다.

사에코는 울지 않았다. 울면 주변 사람들이 볼 것이다. 대신 수험표를 접고, 학교 정문을 나와, 조금 걷다가 전봇대 옆에서 멈췄다.

그제야 숨이 나왔다.

합격.

그녀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공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사오를 바꿔달라고 했다. 오래 기다렸다. 뒤에서 기계 소리가 들렸다. 마사오의 목소리가 나왔다.

“무슨 일이야?”

“붙었어요.”

잠깐 아무 소리도 없었다.

“켄이치, 붙었어요.”

마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반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마사오가 말했다.

“그래.”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래… 잘됐다.”

“네.”

“당신이 고생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에코는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 마사오가 말했다.

“나 지금 가봐야 해. 나중에 얘기하자.”

전화가 끊겼다.

사에코는 수화기를 든 채 서 있었다.

당신이 고생했어.

그 말 하나로 충분했어야 했다. 그런데 충분하지 않았다.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자신이 미웠다. 마사오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쁜 소식을 듣고도 라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도 자신의 방식으로 이 합격을 위해 일했다.

하지만 합격자 게시판 앞에서 번호를 찾은 사람은 사에코였다. 학원 설명회를 들은 사람도 사에코였다. 켄이치가 울고, 화내고, 문제집을 던지고, 열이 나고, 시험 전날 잠을 못 이루는 모습을 본 사람도 사에코였다.

기쁨마저 나눌 사람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에코는 입학 절차 안내 봉투를 품에 안고 전철을 탔다. 창밖으로 도쿄의 집들이 지나갔다. 낮은 지붕, 전봇대, 작은 공장, 밭, 아파트, 다시 집. 하치오지 쪽으로 갈수록 건물 사이가 넓어졌다.

그녀는 봉투를 열어 합격 통지서를 다시 보았다.

이 종이는 켄이치의 입장권이었다. 그리고 사에코의 출입금지 표시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상하게 평온했다. 원래 그런 일이었다. 부모는 아이를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보내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좋은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에코도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집으로 돌아와 다리미를 꺼냈다. 켄이치의 새 교복이 걸려 있었다. 짙은 색 재킷, 반듯한 바지, 아직 딱딱한 셔츠. 그녀는 다리미판 위에 셔츠를 펼쳤다. 흰 천 위로 증기가 올라왔다.

앞동 여자는 고향을 버리고 나갔다.

사에코는 아들의 교복을 다렸다.

둘 다 단지를 떠나는 준비였다. 하나는 비난받았고, 하나는 축하받았다.

사에코는 주름을 펴며 생각했다.

나는 아직 나갈 때가 아니다.

다리미가 천 위를 지나갔다. 주름이 사라졌다. 셔츠는 점점 더 반듯해졌다. 사에코는 손끝으로 소매선을 눌렀다. 조금 뜨거웠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4장. 본사

켄이치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집 안의 시간이 바뀌었다.

아침은 더 일찍 시작되었다. 사에코는 다섯 시 반에 일어나 밥을 지었다. 도시락에는 냄새가 강한 것을 넣지 않았다. 절임은 넣지 않았고, 생선도 조심했다. 달걀말이, 햄, 감자샐러드, 작은 토마토, 식어도 질척이지 않는 밥. 켄이치가 한 번도 칭찬한 적 없는 도시락들이 매일 아침 식탁 위에서 완성되었다.

켄이치는 말수가 줄었다.

“오늘 늦어?”

“응.”

“학원?”

“도서관.”

“저녁은?”

“몰라.”

몰라.

그 말은 점점 자주 들렸다. 사에코는 처음엔 서운했다. 하지만 곧 그것도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려 했다. 아이가 자기 일정을 가진다는 것은 자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디에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일일이 말하지 않는 것은 부모와 다른 세계를 가진다는 뜻이었다.

사에코는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애썼다. 그런데 막상 그 세계의 문이 닫히자, 손끝이 허전했다.

마사오는 여전히 공장에 다녔다. 반장이라는 이름은 그대로였지만, 예전의 반장은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이 줄었고, 자동화된 기계가 늘었고, 본사에서 내려오는 서류가 많아졌다. 그는 예전처럼 기계 소리만 듣고도 이상을 알아차렸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보고서 양식에 맞춰 적어야 했다.

“현장 보는 시간보다 종이 보는 시간이 더 많아.”

그가 저녁상 앞에서 말했다.

사에코는 된장국을 놓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요.”

“아는 거랑 쓰는 건 다르지.”

마사오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본사 젊은 애들은 글을 참 잘 써. 현장에는 한 시간 서 있어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종이에는 그럴듯하게 써.”

사에코는 마사오의 손을 보았다. 손톱 사이에는 여전히 기름때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검은 선. 그 선들이 그의 이력서보다 더 정확하게 그의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켄이치는 그런 거 잘하겠지.”

마사오가 갑자기 말했다.

사에코는 고개를 들었다.

“뭘요?”

“글 쓰는 거. 말하는 거. 그럴듯하게 하는 거.”

그 말에는 자랑과 서글픔이 섞여 있었다.

사에코는 조용히 말했다.

“그 애는 배웠으니까요.”

마사오는 웃었다.

“우리는 못 배웠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못 배웠다는 말은 둘 사이에서 가끔 놓이는 낡은 물건 같았다. 버리지는 못하지만 매번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물건.

켄이치의 고등학교 생활은 사에코가 상상한 것보다 조용했다.

그는 더 이상 문제집을 던지지 않았다. 짜증도 줄었다. 대신 부모에게 보이는 얼굴 자체가 줄었다. 아침에 나가고, 밤에 돌아오고,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끔 전화가 오면 문을 닫고 받았다. 사에코는 방문 앞을 지나갈 때마다 걸음을 늦췄지만, 안의 말소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날, 켄이치가 말했다.

“엄마, 도시락에 그거 넣지 말라고 했잖아.”

“뭐?”

“아침에 들어 있던 거.”

사에코는 잠시 생각했다.

“무 절임?”

“응. 냄새 나.”

“조금밖에 안 넣었는데.”

“그래도.”

켄이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사에코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부터 절임을 넣지 않았다.

그 무 절임은 에치고식이었다. 어머니가 겨울마다 만들던 것과 비슷하게 하려고 몇 번이나 실패한 뒤 겨우 맛을 맞춘 것이었다. 마사오는 좋아했다. 예전에는 켄이치도 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학교 도시락에 들어가면 안 되는 냄새가 되었다.

그날 저녁, 마사오가 빈 접시를 보며 물었다.

“요즘 절임 안 하네.”

“켄이치가 별로래요.”

“그래.”

그뿐이었다.

사에코는 그 짧은 대답 뒤에 놓인 것을 느꼈다. 마사오도 알고 있었다. 아이가 조금씩 자신들의 냄새를 벗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둘 다 그것을 막고 싶지 않았다.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처음부터 바란 일이었다.

부모의 냄새가 나지 않는 아이.

고향의 말끝이 남지 않은 아이.

도쿄에서 태어났고, 도쿄의 학교를 다니고, 도쿄의 말투로 자기 의견을 말하는 아이.

사에코는 냉장고 안쪽으로 절임 그릇을 밀어 넣었다. 며칠 뒤 그것은 물러졌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버렸다.

앞동 오오타니 미치코가 떠난 뒤, 단지는 한동안 그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두가 말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소문이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남은 것은 빈 베란다와 이따금 놀이터에서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뿐이었다.

오오타니의 남편은 몇 달 뒤 다른 지역 사택으로 옮겼다. 아이들도 함께 갔다고 했다. 단지 사람들은 “그게 낫지”라고 말했다. 사에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켄이치는 대학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교 이름이 아니라 학부 이름이었다.

“경제학부가 나을까.”

사에코는 고개를 들었다.

“경제?”

“응. 취직 생각하면.”

“벌써 취직 생각해?”

켄이치는 조금 웃었다.

“다들 해.”

다들.

그 말도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다들 학원에 간다. 다들 모의고사를 본다. 다들 대학 이름을 정한다. 다들 영어가 중요하다고 한다. 사에코는 그 ‘다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켄이치의 친구들, 학교 선생님, 학원 강사, 잡지, 텔레비전, 도쿄 전체. 어쩌면 그 모든 것이었다.

“아버지한테도 말해봐.”

사에코가 말했다.

켄이치는 젓가락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아빠는 잘 모르잖아.”

사에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날 밤 마사오가 돌아왔을 때, 사에코는 대학 이야기를 꺼냈다.

“켄이치가 경제학부 생각한대요.”

마사오는 양말을 벗다가 멈췄다.

“경제?”

“취직 생각하면 좋대요.”

“누가?”

“다들.”

마사오는 웃었다.

“그 다들이 누군데.”

“나도 몰라요.”

둘은 잠시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마사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본사 가려면 그런 데가 좋겠지.”

사에코는 그를 보았다.

“본사?”

“그냥.”

마사오는 시선을 피했다.

“공장 반장 아들이 본사 가면 웃기잖아.”

“웃긴 게 아니라 좋은 거죠.”

“그래. 좋은 거지.”

그는 컵을 내려놓았다.

“내가 현장에서 평생 보고만 한 그 건물에, 켄이치가 사원증 달고 들어가면…”

말은 거기서 끊겼다.

사에코는 그가 어떤 건물을 말하는지 몰랐다. 본사 건물. 이름은 늘 들었지만 직접 가본 적은 없었다. 마사오도 몇 번밖에 없다고 했다. 교육이나 회의 때문에 갔을 때마다 그는 양복이 불편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디를 봐야 할지 몰랐다고 했다.

본사.

그 단어는 집 안에서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공장과 대비되는 곳이었다. 그 다음에는 마사오가 눌리는 곳이었다. 이제는 켄이치가 가야 할 곳이 되었다.

사에코는 그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이상하게 하얀 로비를 떠올렸다. 반짝이는 바닥, 높은 천장, 손이 깨끗한 남자들, 적당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여자들. 그곳에서는 누구도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르지 않을 것 같았다. 기름 냄새도, 땀 냄새도, 도시락의 절임 냄새도 없을 것 같았다.

켄이치는 그런 곳에 어울릴 수 있을까.

곧바로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어울려야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집 안은 입시의 열기로 눅눅했다. 켄이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에코는 문 앞에 차를 놓고, 과일을 놓고, 조용히 돌아섰다. 마사오는 이 무렵부터 허리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하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다.

“시간 없어.”

“토요일에 가요.”

“토요일도 출근.”

“예전만큼 잔업 안 해도 되잖아요.”

“학비가 그냥 나오나.”

사에코는 입을 다물었다.

대학 등록금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지만,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보다 더 들 것이다. 더 많은 돈, 더 긴 시간, 더 멀리 가는 전철. 사에코는 통장을 펼쳐보고, 숫자를 옮겨 적고, 다시 지웠다. 마사오의 퇴직금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대출은 조금 남아 있었고, 친정에 보내는 돈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끊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사에코는 켄이치의 방에서 빈 컵을 가져오다가 책상 위의 모의고사 결과표를 보았다. 지망 대학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이름을 읽는 순간, 그녀는 숨을 멈췄다.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들은 이름. 신문에서 본 이름. 미즈노 부인이 언젠가 “거긴 정말 어렵죠”라고 말했던 이름.

사에코는 결과표를 내려놓았다. 아이에게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 드러날까 봐서가 아니었다. 이미 모른다는 것은 오래전에 드러났다. 다만 그 이름이 너무 멀어서, 입에 올리면 부서질 것 같았다.

그날 밤 그녀는 마사오에게 말했다.

“켄이치, 아주 높은 데 생각하나 봐요.”

마사오는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사에코는 대학 이름을 말했다.

마사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낮게 웃었다.

“그런 데를?”

“네.”

“갈 수 있대?”

“모르죠.”

“선생님이 뭐래?”

“나도 몰라요. 아직 안 물어봤어요.”

마사오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가면 좋지.”

그는 마치 혼잣말처럼 말했다.

“가면… 진짜 좋지.”

사에코는 그 말에 담긴 욕망을 들었다. 가면 좋지. 그것은 아이의 장래만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었다. 둘의 과거를 바꾸고 싶은 문장이었다. 자신들은 중학교에서 멈췄지만, 아이가 그 이름의 대학에 들어가면, 멈춘 곳이 조금 덜 부끄러워질 것 같았다.

입시가 끝나는 겨울까지, 집은 숨을 죽였다.

합격 발표 날은 눈이 조금 날렸다. 도쿄의 눈은 고향의 눈처럼 쌓이지 않았다. 공중에서 망설이다가 아스팔트에 닿으면 금방 녹았다. 사에코는 역으로 가는 길에 손바닥을 펼쳤다. 작은 눈송이가 닿고 사라졌다.

켄이치는 이번에는 혼자 갔다.

“같이 안 가도 돼.”

그가 말했다.

사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사오는 공장에 있었다. 사에코는 집에서 전화를 기다렸다. 빨래를 개고, 다시 개고, 이미 닦은 식탁을 또 닦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너무 컸다.

전화가 울렸을 때, 사에코는 바로 받지 못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제야 수화기를 들었다.

“엄마.”

켄이치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응.”

“붙었어.”

사에코는 말을 잃었다.

“엄마?”

“응.”

“붙었다고.”

“그래.”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

“잘했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더 말하면 울 것 같았다. 켄이치는 “아빠한테도 전화할게”라고 하고 끊었다.

사에코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식탁 앞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기뻐서인지, 안도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마사오는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정확히는 일찍 돌아오려고 했지만 그래도 늦었다. 그는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진짜야?”

사에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했어요.”

마사오는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작업복 차림이었다. 갈아입지도 않고, 손도 씻지 않은 채였다.

“그 대학에?”

“네.”

마사오는 천천히 앉았다. 그리고 웃었다. 웃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에코는 처음으로 마사오가 우는 것을 보았다. 아주 조용히, 부끄러운 듯이. 그는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말했다.

“미안.”

“왜 미안해요?”

“그냥.”

그냥.

그 말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것. 아이가 공부하는 방에 들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 돈은 벌었지만, 아이의 마음을 돌보는 일은 사에코에게 맡긴 것. 본사 사람 앞에서 작아졌던 것. 아들이 이제 자신보다 더 멀리 간다는 기쁨과, 자신이 그 길을 전혀 모른다는 서러움.

사에코는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멈췄다. 부부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은 위로하는 데 서툴렀다. 서로의 약점을 가려주는 데는 익숙했지만, 드러난 약점을 만지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켄이치는 합격 통지서를 몇 번이나 보았다. 마사오는 맥주를 마셨고, 사에코는 반찬을 계속 데웠다. 먹을 사람은 없었지만, 무언가를 해야 했다.

켄이치가 대학생이 되자, 집은 더 넓어졌다.

그는 수업, 동아리, 아르바이트, 친구, 세미나, 취업 준비라는 말들을 가져왔다. 사에코는 그 말들을 하나씩 들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켄이치는 더 이상 학교 프린트를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자기 일은 자기가 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인데, 사에코의 하루에서 해야 할 일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 빈자리를 청소로 메웠다. 창틀을 닦고, 장롱을 정리하고, 오래된 프린트를 버리고, 켄이치의 초등학교 때 물건을 상자에 넣었다. 그러다 영어 교재를 발견했다. 방과후 수업에서 쓰던 얇은 책이었다.

Apple. Book. Mother.

Mother 옆에는 켄이치가 어릴 때 그린 얼굴이 있었다. 둥근 눈, 짧은 머리, 입꼬리가 올라간 사람. 사에코인지, 교재 속 그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상자에 넣었다.

대학 3학년이 되자, 켄이치는 취업 이야기를 했다.

“본사도 볼 거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사에코는 순간 젓가락을 놓쳤다.

“아버지 회사?”

“응.”

“공장 말고?”

켄이치가 웃었다.

“엄마, 대학 나와서 공장 라인 들어가진 않지.”

그 말은 농담이었다. 켄이치에게는 아무 뜻도 없었다. 하지만 사에코는 마사오를 보았다.

마사오는 웃고 있었다. 조금 늦게.

“그래. 본사 봐야지.”

그는 말했다.

“네가 가면 좋지.”

켄이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혹은 보았지만 읽지 못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마사오는 맥주잔을 들었다.

“맞는 말이야.”

그가 말했다.

“대학 나와서 라인 들어갈 건 없지.”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는 말은 늘 상처를 덜어주지 않았다.

켄이치의 취업 준비는 사에코가 도울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력서도, 면접도, 회사 설명회도 모두 켄이치가 알아서 했다. 사에코는 양복을 다림질해주고, 아침밥을 차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마사오는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어느 날, 그는 퇴근 후 손을 씻다가 말했다.

“오늘 본사에서 신입 채용 얘기가 내려왔어.”

“켄이치도 거기 지원한다잖아요.”

“응.”

“말해봤어요? 회사 사람들한테?”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말하면 안 돼.”

“왜요?”

“떨어지면…”

그는 말을 끊었다.

사에코는 알았다. 떨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기대한 것이 들키는 게 두려웠다. 공장 반장 아들이 본사에 지원한다는 말. 그것은 자랑이기도 하고, 부탁처럼 들릴 수도 있고, 우스갯거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마사오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켄이치가 최종 면접을 보러 간 날, 마사오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사에코는 그가 잠을 거의 못 잤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괜찮아요?”

“내가 면접 보는 것도 아닌데 뭐.”

그는 웃었다.

하지만 현관에서 구두를 신다가 한참 멈췄다.

“켄이치한테 말해줘.”

“뭐라고요?”

“그냥… 잘 보고 오라고.”

“직접 말해요.”

“됐어. 부담돼.”

마사오는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

켄이치는 늦은 아침 양복을 입고 나왔다. 사에코는 넥타이를 봐주려 했지만, 켄이치가 손으로 막았다.

“됐어. 내가 할게.”

“비뚤어졌어.”

“괜찮아.”

그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고쳤다. 사에코는 그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아들이 자신보다 남자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오래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저녁이 되어도 연락은 없었다. 다음 날도 없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엄마.”

켄이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대학 합격 때와 같았다.

“응.”

“붙었어.”

사에코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어디?”

회사 이름을 말하고, 켄이치는 짧게 덧붙였다.

“본사.”

사에코는 수화기를 든 채 거실을 보았다. 마사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식탁 위에는 저녁 준비가 반쯤 되어 있었다. 된장국은 아직 끓기 전이었다.

“정말?”

“응.”

“정말 본사?”

켄이치가 웃었다.

“응, 엄마. 본사.”

본사.

그 단어가 방 안에서 울렸다. 오래된 단어였다. 마사오가 눌리던 단어. 미즈노 부인의 남편이 속해 있던 단어. 사택단지의 보이지 않는 서열을 만들던 단어. 이제 그 단어가 켄이치의 것이 되었다.

사에코는 수화기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전화를 끊고, 사에코는 의자에 앉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몸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오래 열려 있던 서랍이 닫히는 소리. 긴 복도 끝의 불이 하나씩 꺼지는 느낌.

마사오는 밤 아홉 시가 넘어 돌아왔다.

“켄이치한테 전화 왔어요.”

사에코가 말했다.

마사오는 작업복을 벗다 말고 멈췄다.

“뭐래?”

“붙었대요.”

“어디?”

사에코는 그를 보았다.

“본사.”

마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냉장고 소리만 들렸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사에코는 수화기를 건넸다.

“전화해봐요.”

마사오는 한참 망설이다가 번호를 눌렀다. 켄이치가 받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다.”

그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들었다.”

잠시 침묵.

“축하한다.”

또 침묵.

“그래. 잘했다.”

사에코는 마사오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낯선 얼굴이었다. 공장에서 기계 앞에 서 있던 얼굴도, 본사 주임 앞에서 말을 고르던 얼굴도 아니었다. 평생 닿지 못한 곳에 아들이 먼저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얼굴.

전화를 끊은 뒤에도 그는 수화기를 한참 내려놓지 못했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진짜 본사라니.”

사에코는 부엌으로 갔다. 밥을 데우고, 된장국을 끓이고, 반찬을 접시에 담았다. 손이 움직였다.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다.

에치고에서 온 여자와 아키타에서 온 남자가 하치오지 공장에서 만났다. 서로의 사투리를 못 들은 척하며 결혼했다. 사택단지에서 본사 사람들의 말투를 배웠고, 도쿄 아이를 키웠다. 고등학교, 대학, 그리고 본사. 켄이치는 부모가 몰라서 두려워했던 문들을 하나씩 열고 지나갔다.

이보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날 밤, 마사오는 조금 마셨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대신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했다.

“본사라니.”

사에코는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회의하러 가면 길도 헷갈리던 그 건물에.”

“네.”

“켄이치가 매일 가는 거네.”

“네.”

“참…”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며칠 뒤, 켄이치가 집에 와서 말했다.

“회사 가까운 데로 방 구하려고.”

사에코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집에서 다니기 힘들지.”

“응. 아침도 그렇고.”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을 때는 회사 가까운 게 좋아.”

그 말은 축복처럼 들렸지만, 사에코는 그 안에 놓인 포기를 들었다. 켄이치는 이제 하치오지에서 본사로 통근하는 아이가 아니라, 본사 근처에서 사는 사람이 된다. 출생지는 하치오지였지만, 생활은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켄이치의 방을 정리하던 날, 사에코는 오래된 교복을 꺼냈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 다렸던 셔츠는 이제 목둘레가 작았다. 바지는 짧았다. 책상 서랍에는 대학 입시 때 쓰던 샤프심, 영어 단어장, 말라붙은 지우개가 있었다.

그녀는 하나씩 상자에 담았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하려 했지만, 무엇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도시락을 싸던 아침들, 학원비 봉투, 밤에 끓인 우동, 모르는 학교 이름을 받아 적던 손. 그 모든 것이 물건마다 묻어 있었다.

켄이치는 자기 짐을 빠르게 챙겼다.

“이거 버려도 돼.”

“이것도?”

“응. 필요 없어.”

“이 영어책은?”

“그런 게 아직 있었어?”

그는 웃었다.

“버려.”

사에코는 책을 들고 있었다. 방과후 영어 교재였다. Apple, Book, Mother. Mother 옆에는 어릴 때 그린 얼굴이 있었다.

“이건 남겨둘게.”

“마음대로 해.”

켄이치는 관심 없이 돌아섰다.

이사 날, 사에코는 작은 상자를 싸주었다. 수건, 밥그릇, 젓가락, 감기약, 바느질 세트, 그리고 냉동해둔 반찬 몇 가지. 켄이치는 조금 귀찮아했지만 받았다.

“엄마, 나도 이제 알아서 해.”

“알아서 해도 처음엔 필요해.”

“알았어.”

마사오는 차를 빌려 짐을 옮겼다. 켄이치의 새 방은 본사에서 전철로 몇 정거장 거리였다. 좁지만 깨끗했다. 창밖으로는 도로와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사에코는 방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곳에는 공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택단지의 아이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향 냄새도 없다.

켄이치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짐을 다 옮기고 돌아오는 길, 마사오는 말이 없었다. 사에코도 말하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도쿄의 건물들이 지나갔다. 높고 낮은 건물, 전철 고가, 광고판, 좁은 골목, 다시 큰 도로.

하치오지로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조금 넓어졌다.

마사오가 문득 말했다.

“우리도 이제 집 알아볼까.”

“집?”

“사택도 오래 있었고. 켄이치도 자리 잡았고.”

사에코는 그를 보았다.

“단독주택?”

마사오는 앞만 보고 말했다.

“대출은 좀 해야겠지만. 정년 전에 어떻게든.”

사에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단독주택.

그 말은 오랫동안 먼 곳에 있던 마지막 칸 같았다. 기숙사, 사택, 단지, 아이의 학교, 대학, 본사. 그 다음 칸. 주택 스고로쿠의 끝. 거기까지 가면 정말 끝나는 것일까.

“좋네요.”

사에코가 말했다.

마사오는 작게 웃었다.

“우리도 남들처럼.”

우리도 남들처럼.

그 말은 둘의 결혼생활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몇 달 뒤, 그들은 하치오지의 조금 안쪽에 있는 단독주택을 보러 갔다. 역에서는 버스를 타야 했지만, 작은 마당이 있었다. 2층에는 방이 두 개 있었고, 부엌 창문으로 옆집 담장이 보였다. 감나무 한 그루가 마당 구석에 서 있었다. 열매는 별로 달리지 않는다고 부동산 중개인이 말했다.

사에코는 마당에 서서 감나무를 보았다.

베란다가 아니라 땅 위에 빨래를 널 수 있다. 복도가 아니라 자기 현관이 있다. 위층 아이의 발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쓰레기장에서 누가 어느 부서인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집이네요.”

사에코가 말했다.

마사오는 중개인 앞이라 어색하게 웃었다.

“대출은 좀 있지만.”

“그래도 우리 집.”

계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사오는 정년 전 마지막 큰 결심처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사에코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았다. 도장 소리가 작게 났다. 그 소리가 어쩐지 합격 도장처럼 들렸다.

이사 날, 사택단지의 몇몇 부인들이 도와주러 왔다. 미즈노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예전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있었지만, 여전히 말투가 부드러웠다.

“사에코 씨, 드디어 단독주택이네요.”

“네. 덕분에.”

“무슨 말씀을. 정말 잘 사셨어요.”

잘 살았다.

사에코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트럭이 떠나고, 짐이 새집에 쌓이고, 해가 질 무렵 사에코는 마당에 섰다. 단지에서는 늘 소리가 있었다. 아이들이 뛰는 소리, 부인들이 말하는 소리, 위층 청소기 소리, 아래층 라디오 소리, 누군가가 남편의 부서를 묻는 소리. 이 집에는 소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유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사에코는 알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도 자신의 하루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물을 사람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단지에서는 남들이 자신을 너무 많이 알았다.

이 집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보다 더 숨이 막혔다.

마사오는 여전히 공장에 다녔다. 정년까지는 조금 남아 있었다. 아침이면 작업복을 입고 나갔고, 저녁이면 돌아왔다. 예전보다 야근은 줄었지만, 피로는 줄지 않았다. 켄이치는 본사 근처에서 바쁘게 살았다. 가끔 전화가 왔고, 명절에는 얼굴을 비쳤다.

사에코는 집을 닦았다. 새집이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집이었다. 창틀, 마당, 부엌, 계단, 2층 빈방. 닦고 정리할 곳은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하루는 길었다.

어느 날, 그녀는 마당에 빨래를 널다가 손을 멈췄다. 바람이 불었다. 셔츠가 흔들렸다. 감나무 잎이 소리를 냈다. 멀리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집 아이들인지 몰랐다.

사에코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이거였나.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웠다.

원했다.

원해야 했다.

이 집은 성공의 증거다.

켄이치가 본사에 들어갔고, 우리는 단독주택을 샀다.

나는 성공한 것이다.

그날 저녁, 마사오가 말했다.

“오늘 공장에서 켄이치 얘기 나왔어.”

“그래요?”

“본사 신입 명단에 이름 봤다는 사람이 있더라.”

그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이었다.

“다들 대단하다더군.”

사에코는 웃었다.

“당신이 자랑했겠죠.”

“안 했어.”

“했을 거예요.”

“조금.”

둘은 오랜만에 함께 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끝나자,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사에코는 식탁 위의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마사오는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 속에서는 도쿄 도심의 빌딩들이 비쳤다. 뉴스는 경기와 회사와 정치 이야기를 했다.

사에코는 화면 한쪽에 스쳐 지나간 빌딩 숲을 보았다.

저 어딘가에 켄이치가 있다.

저 어딘가에 본사가 있다.

마사오가 평생 밖에서 바라본 곳.

사에코가 평생 아이를 보내려 한 곳.

아들은 그곳에 들어갔다.

사에코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충분해야 했다.

5장. 길을 비켜주는 일

명예퇴직 이야기를 처음 꺼낸 것은 마사오가 아니라 켄이치였다.

장마가 끝난 뒤의 일요일이었다. 오후 늦게 켄이치가 집에 왔다. 양복은 아니었지만, 흰 셔츠 깃에는 여전히 본사 사람의 반듯함이 남아 있었다. 사에코는 냉차를 내왔고, 마사오는 거실에서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창밖의 감나무 잎은 여름빛을 받아 짙었고, 선풍기 바람은 식탁 위 신문을 조금씩 들썩이게 했다.

켄이치는 냉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아버지, 회사에서 혹시 이야기 나왔어요?”

마사오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

“희망퇴직 특별가산이요.”

그 순간 야구 중계 소리가 방 안에서 이상하게 커졌다.

마사오는 천천히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줄였다. 화면 속 투수가 공을 던졌지만,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 얘기 하러 왔냐?”

켄이치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요. 조건이 나쁘지 않아서요.”

사에코는 냉차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잔 안에서 얼음이 작게 부딪혔다.

켄이치는 가방에서 얇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 회사 로고가 찍힌 봉투였다. 사에코는 그 로고를 보았다. 마사오의 작업복 가슴에도, 켄이치의 사원증에도, 본사 건물 입구에도 붙어 있는 같은 모양. 같은 회사였지만, 봉투를 꺼내는 켄이치의 손과 그것을 보는 마사오의 손은 전혀 달랐다.

“아직 전체 공지는 안 됐을 수도 있는데, 곧 내려갈 거예요. 아버지 연차면 가산금이 꽤 붙어요. 정년까지 남은 급여랑 비교해도 손해는 아니고, 남은 대출도 정리할 수 있고…”

마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켄이치는 서류를 펼쳤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이, 근속연수, 특별가산율, 재취업 상담, 퇴직금 지급 시기. 사에코는 글자를 읽을 수 있었지만, 그 숫자들이 어떤 무게인지 바로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켄이치가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설명한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경우에는 여기 해당될 거예요. 근속 35년 이상, 정년 전 3년 이내. 특별가산금이 붙으면…”

켄이치의 손가락이 표 위를 움직였다.

깨끗한 손이었다.

사에코는 그 손을 보았다. 길고, 희고, 손톱 끝이 고른 손. 어릴 때 젓가락을 서툴게 잡던 손, 영어 교재 위에 Mother라고 쓰던 손, 고등학교 합격증을 들고 있던 손. 이제 그 손이 서류 위의 숫자를 짚고 있었다.

마사오의 퇴직금.

남은 근속연수.

주택대출 잔액.

세금.

선택 시기.

모든 것이 칸 안에 들어 있었다.

켄이치는 아버지를 밀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에코는 그것을 알았다. 그는 오히려 좋은 아들이었다. 회사 안에서 먼저 알게 된 정보를 부모에게 알려주고,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을 하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본사에 들어간 아들이 공장에 있는 아버지를 챙겨주는 일. 남들이 보면 효도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에코는 동시에 알았다.

켄이치는 아버지가 언제 물러나야 손해가 아닌지를, 아버지보다 먼저 알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요즘 현장도 세대교체 이야기 나오잖아요.”

켄이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요시다 씨? 그분도 이제 올라가신다면서요.”

마사오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누가 그래.”

“본사 쪽에서도 이름이 나와요. 차기 공장장 후보로.”

“본사에서는 별걸 다 아는구나.”

마사오의 목소리는 낮았다.

켄이치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사에코는 그 얼굴도 이해했다. 켄이치는 계산을 말하고 있었다. 마사오는 생애를 듣고 있었다.

“아버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무슨 뜻인데.”

“몸도 생각하셔야죠. 허리도 안 좋으시고. 조건 좋을 때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거예요. 대출도 끝낼 수 있고, 앞으로 쉬실 수도 있고.”

“내가 아직 일 못 하는 사람 같냐?”

켄이치의 얼굴이 굳었다.

“아니에요.”

“본사에서는 그렇게 보이나?”

“아버지.”

“공장 사람들한테는 얘기도 안 내려온 걸 네가 먼저 들고 오는 거냐?”

“곧 공지될 거예요. 저는 그냥 미리…”

“미리?”

마사오가 웃었다.

웃음은 짧았다.

“본사는 참 빠르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창밖에서 매미가 울었다. 야구 중계 화면에서는 점수가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경기였다.

켄이치는 서류를 접으려 했다.

“제가 괜한 얘기 했네요.”

사에코가 말했다.

“아니야. 가져온 건 잘했어.”

그녀는 켄이치를 보았다. 아들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어릴 때 혼났을 때처럼 입술을 조금 다물고 있었다. 켄이치는 나쁜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부모가 바란 대로 배웠고, 올라갔고, 본사의 언어를 익혔다. 그리고 이제 그 언어로 부모를 도우려 했다.

그런데 그 언어가 부모를 찔렀다.

마사오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그는 텔레비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놔두고 가라.”

“아버지.”

“본다. 나중에.”

켄이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은 어색했다. 사에코는 평소보다 반찬을 많이 했지만, 젓가락은 자주 멈췄다. 마사오는 말을 아꼈고, 켄이치도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날씨와 야구와 물가 이야기를 했다. 세 사람은 가족처럼 대화했지만, 식탁 위에는 접힌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켄이치가 돌아갈 때, 사에코는 현관까지 배웅했다.

“괜히 말했나 봐.”

켄이치가 낮게 말했다.

“아니야. 아버지도 알아. 네가 생각해서 말한 거.”

“화내셨잖아.”

“화난 게 아니야.”

“그럼?”

사에코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놀란 거지.”

켄이치는 구두를 신다가 말했다.

“조건은 정말 괜찮아. 정년까지 그냥 다니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어. 아빠한테도 나쁜 얘기는 아니야.”

“알아.”

“엄마도 생각해봐. 대출 없어지면 편하잖아.”

“그래.”

“아버지는 쉬셔야 해. 계속 현장에 계시기엔…”

켄이치는 말을 멈췄다. 그 뒤의 말을 삼킨 것 같았다.

나이가 많다.

몸이 힘들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 말들은 모두 맞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조심해서 가.”

사에코가 말했다.

켄이치는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자 집 안이 한층 더 조용해졌다.

거실로 돌아오자 마사오는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접힌 서류 봉투가 탁자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켄이치,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사에코가 말했다.

마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건이 좋다잖아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사에코는 말을 골랐다.

“대출 정리할 수 있으면 좋긴 하죠.”

마사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말은 동의처럼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나가면 좋겠다는 거구나.”

“그런 말 아니잖아요.”

“아니지. 아무도 그런 말은 안 하지.”

마사오는 서류 봉투를 손끝으로 눌렀다.

“다들 좋은 말만 하지. 조건이 좋다. 몸을 생각해라. 세대교체다. 길을 열어줘라.”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근데 결국 나가라는 말이잖아.”

사에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켄이치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마사오는 덧붙였다.

“그 녀석은 좋은 뜻으로 말했겠지. 머리도 좋고, 계산도 빠르고, 본사 사람이니까.”

본사 사람.

그 말이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순간, 사에코는 가슴이 조금 저렸다. 평생 바랐던 말이었다. 켄이치는 본사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제 가족 안에서 거리를 만들었다.

마사오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는 숫자들을 읽고 있었지만, 사에코는 그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 출근 날, 기숙사, 라인, 젊은 작업자들, 불량품을 잡아내던 손, 야근, 반장 임명, 요시다의 첫 실수, 공장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시간. 그 모든 것이 숫자들 뒤에 서 있었을 것이다.

“조건은 좋네.”

마사오가 말했다.

“그래요?”

“응.”

그는 웃었다. 이번에는 아주 작게.

“참 잘 만들었어. 나가고 싶게.”

며칠 뒤, 회사에서 공식 공지가 내려왔다.

희망퇴직 특별가산. 장기근속자 대상. 정년 전 일정 기간 내 신청 가능. 재취업 상담 지원. 퇴직금 가산. 생활설계 세미나.

마사오는 서류를 집으로 가져왔다. 이번 것은 켄이치가 가져온 것보다 더 두꺼웠다. 그는 식탁에 펼쳐두고, 저녁 내내 읽었다. 빨간 펜으로 몇 군데 표시도 했다.

“켄이치가 말한 거랑 같아요?”

사에코가 물었다.

“거의.”

“그럼…”

“조건은 좋아.”

마사오는 말했다.

“조건은.”

그때부터 그는 말이 줄었다.

아침에는 평소처럼 작업복을 입고 나갔다. 도시락을 들고, 안전화를 신고, 현관에서 “다녀올게”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이전과 다른 무게가 있었다. 사에코는 매일 그 인사를 들으며, 이 말이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을까 생각했다.

공장에서는 요시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문이었다. 그다음에는 회의에서 이름이 나왔다. 마지막에는 거의 확정처럼 말해졌다. 요시다가 다음 공장장이 된다. 마사오보다 젊고, 서류도 빠르고, 본사와의 회의도 능숙하고, 현장 경험도 충분하다.

마사오는 집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요시다, 공장장 된다더라.”

사에코는 된장국을 놓다가 멈췄다.

“정말요?”

“응.”

“당신이 가르친 사람이잖아요.”

“그렇지.”

“좋은 일이네요.”

“좋은 일이지.”

마사오는 젓가락을 들었다.

“좋은 일인데, 사람 마음이 참.”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사에코는 그 말을 알 것 같았다. 요시다가 공장장이 되는 것은 마사오의 성취이기도 했다. 후배가 올라갔다는 것은 자신이 헛일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더 이상 그 자리의 미래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며칠 뒤, 마사오는 요시다와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많이 마신 듯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벽을 짚었다. 사에코가 물을 가져오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요시다가 울더라.”

“요시다 씨가요?”

“응. 자기가 밀어낸 것 같다고.”

마사오는 웃었다.

“바보 같은 놈. 누가 밀어냈다고.”

사에코는 물컵을 건넸다.

“그 사람이 미안한가 보죠.”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가르친 놈이 공장장 되는 건데. 좋은 일이지.”

“네.”

마사오는 물을 마셨다. 그러다 갑자기 말했다.

“아무도 말 안 할 때 비켜야 모양이 좋아.”

사에코는 그를 보았다.

아무도 말 안 할 때.

그러나 이미 켄이치가 말했다. 회사가 말했다. 숫자가 말했다. 요시다의 승진이 말했다. 시대가 말했다. 마사오는 그 모든 말을 듣고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래야 스스로 선택한 일이 되니까.

“당신이 정하는 거예요.”

사에코가 말했다.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정하는 거지.”

그 말에 안도하려는 듯,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퇴직 신청서를 쓰는 날, 마사오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휴일이었다. 식탁 위에는 회사 서류와 인감, 볼펜이 놓여 있었다. 사에코는 차를 내왔다. 마사오는 서류를 한 장씩 읽었다. 이미 여러 번 읽은 것이었다. 그래도 다시 읽었다.

“여기 이름 쓰면 되나.”

“그런 것 같아요.”

“날짜는 오늘?”

“네.”

마사오는 볼펜을 들었다. 손가락이 아주 조금 떨렸다. 기름때와 흉터가 있는 손. 수십 년 동안 기계와 쇠붙이와 작업표를 만진 손. 그 손이 깨끗한 신청서 위에 이름을 썼다.

사토 마사오.

그는 잠시 자기 이름을 보았다.

“참.”

그가 말했다.

“이름 쓰는 걸로 끝나는구나.”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사오는 도장을 찍었다. 둥근 붉은 인영이 종이 위에 남았다.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사에코에게는 무언가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얼마 뒤, 퇴직금 명세가 나왔다.

켄이치가 말한 대로 조건은 좋았다. 특별가산금이 붙었고, 남은 주택대출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사에코는 숫자를 보고도 한동안 실감하지 못했다.

“이걸로 대출 정리하자.”

마사오가 말했다.

“전부요?”

“응. 빚 없는 집이 되는 거야.”

빚 없는 집.

사에코는 마당을 보았다. 감나무 잎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이 집은 이제 정말 그들의 것이 된다. 은행의 것이 아니라, 회사 사택도 아니라, 기숙사도 아니라,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사는 방도 아니라.

우리 집.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사에코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이 이제 완성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이 생각보다 들뜨지 않았다. 숫자는 깔끔했지만, 그 깔끔함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은행에서 대출 상환 절차를 마친 날, 직원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걸로 전액 상환 완료입니다.”

전액 상환 완료.

사에코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상환. 완료. 은행원은 축하한다는 듯 웃었다. 마사오도 고개를 숙였다. 도장을 몇 번 더 찍고, 서류를 받아 나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마사오가 말했다.

“이제 빚 없다.”

“그러네요.”

“좋은 거지.”

“좋은 거죠.”

“켄이치한테도 말해야겠다.”

“좋아하겠어요.”

마사오는 창밖을 보았다.

퇴직 전 마지막 한 달은 이상하게 빨리 지나갔다.

마사오는 예전보다 더 단정하게 출근했다. 작업복을 깨끗이 입고, 안전화를 닦고, 도시락 가방도 새것처럼 챙겼다. 사에코는 그것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더 흐트러질 것 같지만, 마사오는 반대로 더 반듯해졌다. 끝까지 흠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회사에서는 몇 번이나 송별 자리가 있었다. 반별로 한 번, 현장 전체로 한 번, 관리자들과 한 번. 마지막 주에는 요시다가 직접 집까지 찾아와 인사했다.

그는 현관 앞에서 깊이 머리를 숙였다.

“사토 반장님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마사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공장장 될 사람이 무슨 반장님이야.”

“저한텐 계속 반장님입니다.”

요시다는 진심으로 말했다.

사에코는 차를 내왔다. 요시다는 두 손으로 찻잔을 받았다. 그는 예전보다 살이 붙었고, 말투도 차분해졌다. 하지만 사에코 눈에는 여전히 마사오 뒤를 따라다니던 젊은 노동자처럼 보였다.

“앞으로 공장 잘 부탁해.”

마사오가 말했다.

요시다는 고개를 숙였다.

“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사에코는 그 침묵 속에서 마사오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자부심일까. 허전함일까. 질투일까. 아버지가 아들을 내보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까. 아니면 자신이 평생 지킨 자리를 남에게 넘겨주는 사람의 쓸쓸함일까.

요시다가 돌아간 뒤, 마사오는 오래 현관에 서 있었다.

“좋은 놈이야.”

그가 말했다.

“네.”

“나보다 잘할 거야.”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사오는 신발장을 닫으며 작게 말했다.

“그래야지.”

마지막 출근 날 아침, 사에코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도시락을 쌌다. 이제 마지막 도시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손이 이상하게 굳었다. 반찬은 특별할 것 없는 것이었다. 달걀말이, 구운 연어, 시금치무침, 매실장아찌. 오래전부터 마사오가 좋아하던 것들. 사에코는 도시락 뚜껑을 덮기 전 한참 바라보았다.

마사오는 말없이 밥을 먹었다. 넥타이는 하지 않았다. 퇴직 인사를 하는 날이었지만, 그는 평소처럼 작업복을 입었다.

“양복 안 입어요?”

사에코가 물었다.

“공장 사람이 양복 입고 가면 이상하지.”

“그래도 마지막인데.”

“마지막이라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현관에서 사에코는 도시락 가방을 건넸다.

“다녀오세요.”

그 말이 이상했다. 내일부터는 이 말을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디론가 나가기는 하겠지만, 회사로 출근하는 남편에게 하는 말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마사오는 가방을 받았다.

“다녀올게.”

그 말끝이 조금 내려앉았다. 아키타가 아주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사에코는 못 들은 척했다.

문이 닫히고, 집은 조용해졌다.

사에코는 현관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문밖 복도는 없었다. 사택단지가 아니라 단독주택이었다. 이웃집 문이 줄지어 있지도 않았고, 어디선가 남편들이 동시에 출근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서 자전거가 지나가는 소리만 났다.

오후가 되자 켄이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아빠 마지막 출근이지?”

“응.”

“저녁에 갈까?”

사에코는 잠시 생각했다.

“바쁘면 괜찮아.”

“아니, 갈게. 회사 끝나고.”

“아버지가 좋아할 거야.”

켄이치는 잠깐 말이 없었다.

“아빠 괜찮아?”

“괜찮다고 해.”

“그건 괜찮은 게 아닐 때도 하는 말이잖아.”

사에코는 조금 놀랐다. 켄이치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렇지.”

그녀는 웃었다.

“와서 같이 밥 먹자.”

“응.”

전화를 끊고, 사에코는 저녁을 준비했다. 조금 좋은 고기를 샀다. 마사오가 좋아하는 회도 주문했다. 냉장고 안쪽에 오래 두었던 술도 꺼냈다. 켄이치가 올 테니 집안도 다시 닦았다.

마사오는 해가 진 뒤 돌아왔다.

손에는 꽃다발과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꽃다발은 공장에서 받은 듯했다. 포장지는 조금 요란했고, 꽃 몇 송이는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상자는 기념품 같았다.

“수고하셨어요.”

사에코가 말했다.

마사오는 현관 안으로 들어와 한참 서 있었다.

“응.”

그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거.”

“예쁘네요.”

“공장 애들이 줬어.”

“좋네요.”

마사오는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앉았다. 사에코는 차를 내왔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 식탁, 텔레비전, 마당으로 난 창, 감나무.

“이상하네.”

그가 말했다.

“뭐가요?”

“내일 안 가도 된다는 게.”

사에코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좋지 않아요?”

마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좋지.”

그 웃음은 만족한 사람의 웃음 같았다. 동시에 어디에 손을 둬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웃음이기도 했다.

켄이치는 조금 늦게 왔다. 회사에서 바로 온 듯했다. 손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가 있었다.

“아버지, 수고하셨습니다.”

켄이치가 말했다.

마사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하다.”

“왜?”

“본사 사람이 공장 사람한테 인사하는 것 같아서.”

마사오는 농담처럼 말했다.

켄이치는 웃었지만, 사에코는 그 농담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식사는 조용하고도 따뜻했다. 마사오는 공장 이야기를 했다. 오래전 기계가 멈췄던 일, 신입이 실수해 모두 밤새 복구했던 일, 요시다가 처음 들어왔을 때 얼마나 서툴렀는지. 켄이치는 웃으며 들었다. 몇몇 이야기는 처음 듣는 듯했다.

사에코는 그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괜찮아 보였다. 정말 괜찮은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일했고, 아들을 본사에 보냈고, 집 대출도 갚았다. 후배가 공장장이 되었고, 자신은 좋은 조건으로 물러났다. 누가 보아도 잘 마친 인생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켄이치는 막차 전에 돌아갔다. 현관에서 그는 마사오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마사오는 손을 흔들었다.

“너나 잘해.”

켄이치가 웃었다.

“응.”

문이 닫히고,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날 밤, 마사오는 퇴직 기념으로 받은 술을 꺼냈다. 켄이치가 온 자리에서는 열지 않았던 병이었다. 그는 작은 잔에 술을 따르고, 한 모금 마셨다.

“좋은 술이네.”

“아껴뒀던 거잖아요.”

“뭘 아껴. 이제 아낄 것도 없지.”

그는 웃었다.

사에코는 반찬 접시를 다시 정리했다. 감자조림, 구운 생선, 시금치무침. 특별한 날이었지만, 밤이 깊어지자 식탁은 다시 평소와 비슷해졌다.

마사오는 잔을 들고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키타 촌놈이 도쿄 와서 집 장만하고, 자식 좋은 직장 보냈으면 성공한 거지. 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한 거야.”

사에코는 젓가락을 멈췄다.

마사오는 사에코를 보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 반박하기 전에 먼저 결론을 내려버리는 사람처럼. 허전하다고 말하기 전에, 억울하다고 말하기 전에, 아직 더 일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 전에, 아들이 본사에서 자기 퇴직 조건을 설명한 것이 아팠다고 말하기 전에.

성공한 거지. 암.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못이었다. 자기 마음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박아 넣는 못.

사에코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만 스스로를 묶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마사오도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아키타에서 온 촌놈이면 이만하면 됐다.

중졸이면 이만하면 됐다.

공장 사람이면 이만하면 됐다.

아들이 본사에 갔으면 이만하면 됐다.

집 대출을 갚았으면 이만하면 됐다.

그는 자기 안의 서운함을 그 말들로 눌러왔다. 사에코가 “나는 괜찮다”고 말해온 것처럼, 마사오도 “나는 성공했다”고 말해온 것이다.

마사오는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사에코.”

“네.”

“우리 잘한 거지?”

사에코는 남편을 보았다.

젊은 날 세탁장 앞에서 “서로 못 들은 걸로 하지”라고 말하던 남자. 본사 주임 앞에서 말끝을 고르던 남자. 아들이 본사에 붙었다는 말을 듣고 “진짜 본사라니”라고 중얼거리던 남자. 이제 집 안 식탁 앞에서 자기 성공을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남자.

“네.”

사에코는 말했다.

“잘했어요.”

마사오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는 다시 말했다.

“잘한 거지.”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틀리지 않은 말이 사람을 구해주지는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사에코는 평소처럼 다섯 시 반에 눈을 떴다.

잠시 후에야 도시락을 쌀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옆에서 마사오가 자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부엌으로 나가 물을 끓였다. 밥은 전날 남은 것이 있었다.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급한 것이 없었다. 도시락통도, 작업복도, 출근 시간도 없었다.

오랫동안 사에코의 하루를 밀어붙이던 시계들이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마사오는 일곱 시가 넘어 일어났다.

“몇 시야?”

“일곱 시 반.”

그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가, 곧 다시 앉았다.

“아, 그렇지.”

그 표정에는 안도와 당황이 함께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 마사오는 집 안에서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랐다. 신문을 펼쳤다가 덮고, 텔레비전을 켰다가 채널을 돌리고, 마당을 쓸겠다고 나섰다가 빗자루를 어디에 두는지 물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겠다고 했지만, 플라스틱과 불연물을 섞었다.

점심 무렵이면 물었다.

“점심은 뭐야?”

사에코는 대답했다.

“아직 열한 시예요.”

“아니, 그냥.”

그는 멋쩍게 웃었다.

사에코도 웃었다. 첫날이니까. 둘째 날이니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일주일쯤 지나자, 그녀는 부엌에서 접시를 헹구다 문득 생각했다.

차라리 출근할 때가 나았다.

그 생각이 너무 또렷해서, 접시를 떨어뜨릴 뻔했다.

마사오가 나가면 집은 조용했다. 그 조용함은 고독이었다. 이제 마사오는 집에 있고, 집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고독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인 상태였다.

사에코는 그때 알았다.

고독은 사치였구나.

그 말은 마음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단지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뒤, 그녀는 고독을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고,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런데 남편이 매일 집에 있으면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고통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호흡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제 그 호흡에도 누군가의 점심이 들어왔다.

어느 저녁, 마사오는 퇴직금으로 대출을 갚았다는 서류를 다시 꺼내 보았다. 잔액 0. 그는 그 숫자를 볼 때마다 안심하는 것 같았다.

“이제 빚 없다.”

그는 말했다.

“네.”

“집은 우리 거야.”

“네.”

“켄이치한테도 부담 안 가고.”

“네.”

“이만하면 됐지.”

“네.”

이만하면 됐다.

그 말은 날마다 조금씩 두꺼워졌다. 처음에는 만족처럼 들렸다. 시간이 지나자 주문처럼 들렸다. 더 지나자, 사에코에게는 벽처럼 느껴졌다.

이만하면 됐다.

그러니 더 바라지 마라.

이만하면 됐다.

그러니 네 마음이 빈 것은 네 탓이다.

이만하면 됐다.

그러니 조용히 살아라.

마사오도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사에코는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벽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마사오는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사에코는 부엌에서 술잔을 씻었다. 잔 안쪽에 술 냄새가 남아 있었다. 물을 세게 틀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잔을 엎어놓고 한참 서 있었다.

이만하면 됐다.

마사오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에코도 그렇게 말해왔다.

그런데 그 말 뒤에 남는 마음은 어디로 가는 걸까.

종장. 임무 완료

켄이치의 결혼식은 도쿄 시내 호텔에서 열렸다.

마사오는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몸이 조금 굳었다. 천장이 높았고, 바닥은 너무 반짝였다.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웃고, 구두 소리가 넓은 공간에 작게 울렸다. 안내 직원들은 모두 같은 속도로 허리를 숙였다. 사에코는 옆에서 조용히 걸었다. 그녀는 새로 맞춘 옅은 색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올렸고, 말투는 평소보다 더 느렸다.

“괜찮아요?”

사에코가 물었다.

“뭐가.”

“얼굴이 굳었어요.”

마사오는 턱을 만졌다.

“호텔이 너무 크네.”

“켄이치 회사 사람들이 많이 온대요.”

“그렇겠지.”

마사오는 그렇게 대답하고 로비 안쪽을 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이 몇 명 모여 있었다. 모두 자세가 좋았고, 말투가 가벼웠다. 그들 중 하나가 켄이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켄이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다가갔다. 어깨가 펴져 있었다. 호텔도, 본사 사람들도, 이런 결혼식도 처음부터 자기 것인 사람처럼 보였다.

마사오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잘 컸다.

아니, 잘 올라갔다.

아이에게 그런 말을 쓰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켄이치는 올라갔다. 자신과 사에코가 밑에서 밀었고, 아이는 한 칸씩 올라갔다. 고등학교, 대학, 본사, 그리고 이제 결혼식장.

식장 앞에서 사돈 부부가 다가왔다.

신부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얼굴의 남자였다. 회사원인지 공무원인지, 마사오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손이 깨끗했고, 허리를 숙이는 방식이 자연스러웠다. 신부의 어머니는 사에코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늘은 정말 축하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에코가 말했다.

마사오도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아들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은 연습한 말이었다. 전날 밤 사에코가 몇 번이나 같이 맞춰주었다. 너무 짧지도, 너무 굽히지도 않게.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오자 조금 어색했다.

신부의 아버지가 웃었다.

“무슨 말씀을요. 정말 훌륭하게 키우셨습니다. 켄이치 씨는 회사에서도 평이 아주 좋다고 들었습니다.”

마사오는 고개를 더 숙였다.

“아닙니다. 저는 공장 일밖에 몰라서… 다 집사람이 한 일입니다.”

말하고 나서 그는 잠시 멈칫했다.

다 집사람이 한 일.

겸손으로 한 말이었다. 혼주 자리에서 하는 흔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고등학교 설명회에 간 사람은 사에코였다.

학원비 봉투를 챙긴 사람도 사에코였다.

켄이치의 도시락에서 냄새 나는 반찬을 빼준 사람도 사에코였다.

입시일 아침 목도리를 고쳐준 사람도 사에코였다.

합격자 번호를 직접 확인한 사람도 사에코였다.

마사오는 돈을 벌었다. 잔업을 했다. 허리가 아파도 출근했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지나간 문들 앞에서 서 있었던 사람은 대부분 사에코였다.

그는 사에코 쪽을 보았다.

사에코는 사돈 부인과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웃음이 작고 단정했다. 그녀는 이렇게 큰 호텔에서도 어긋나 보이지 않았다. 에치고에서 온 소녀, 하치오지 공장 기숙사 뒤 세탁장에서 작업복을 빨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마사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식이 시작되었다.

켄이치는 검은 예복을 입고 신부 옆에 섰다. 신부는 환하게 웃었다. 젊은 두 사람은 빛을 받고 있었다. 주례의 말, 축사, 박수, 카메라 플래시. 마사오는 박수를 치며 계속 켄이치의 얼굴을 보았다.

저 아이가 정말 내 아들인가.

그 생각은 자랑이면서도 조금 낯설었다. 자신과 같은 성을 쓰고, 자신의 피를 이었지만, 켄이치는 자신이 가본 적 없는 곳의 사람이었다. 본사의 회의실, 대학의 강의실, 이런 호텔의 연회장. 켄이치는 그곳에서 어색해하지 않았다.

마사오는 그 점이 가장 자랑스러웠다.

피로연에서 켄이치가 부모에게 편지를 읽는 순서가 있었다.

마사오는 그런 것을 싫어했다. 울리려고 만든 절차 같았다. 하지만 켄이치가 종이를 펼치자, 그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아버지, 어머니.”

켄이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성실하게 일하셨고, 어머니는 늘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마사오는 잔을 들고 있었다. 손이 조금 굳었다.

성실하게 일했다.

지켜주었다.

간단한 말이었다.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로 다 담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혼식에서는 그 정도면 됐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켄이치는 마지막에 말했다.

“이제 저도 제 가정을 만들겠습니다. 두 분처럼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박수가 울렸다.

마사오는 고개를 숙였다. 눈이 조금 뜨거웠다. 그는 울지 않으려 했다. 사에코는 옆에서 손수건을 눈가에 대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품위 있게 울고 있었다. 마사오는 그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사에코가 울고 있으니 자신은 울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식이 끝난 뒤, 켄이치 부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본사 동료들, 대학 친구들, 신부의 친척들. 마사오는 한발 물러서서 그 모습을 보았다. 사에코도 옆에 섰다.

“끝났네요.”

사에코가 말했다.

“아직 2차회 있다던데.”

“우리 일은요.”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우리 일은 끝났다.

그 말은 조금 이상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켄이치는 결혼했다. 자기 가정을 만들었다. 더 이상 매일 걱정할 아이가 아니었다. 등록금도, 취업도, 결혼식도 끝났다. 부모가 해줄 큰일은 이제 없었다.

마사오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키타 촌놈이 도쿄 와서 집 장만하고, 자식 좋은 직장 보내고, 결혼까지 시켰으면 성공한 거지.

그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암. 성공한 거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 마사오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앉았다. 사에코는 기모노를 정리했다. 오래 걸렸다. 옷을 벗고, 접고, 끈을 풀고, 다시 묶고, 상자에 넣는 소리가 방 안에서 작게 들렸다.

마사오는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오늘은 조용한 게 좋았다. 피곤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몸은 무거웠고, 발도 아팠지만, 마음 어딘가가 반듯하게 정리된 느낌이었다.

사에코가 부엌에서 차를 내왔다.

“수고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마사오는 찻잔을 받았다.

“오늘 사돈 앞에서 말 잘하더라.”

“연습했으니까요.”

“나도 실수 안 했지?”

“네. 잘했어요.”

잘했어요.

마사오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퇴직하던 날에도 사에코는 그렇게 말했다. 잘했어요. 그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오늘도 믿고 싶었다.

“켄이치, 잘 살겠지?”

“그럼요.”

“신부도 좋아 보이고.”

“네.”

“이제 우리도 좀…”

그는 말을 하다 멈췄다.

좀 편하게 살자.

좀 여행도 다니자.

좀 쉬자.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정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두 같은 말이었다. 이제 우리도 좀. 그 뒤에 어떤 단어를 붙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일어났다.

“피곤하죠. 먼저 자요.”

“당신은?”

“정리할 게 조금 있어요.”

“내일 해도 되잖아.”

“오늘 해야 마음이 편해요.”

그 말은 사에코다운 말이었다. 오늘 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 마사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깊이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마사오는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

방 안은 밝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칼질 소리, 물 끓는 소리,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언제나와 같은 아침이었다. 그는 잠시 누워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어제 켄이치가 결혼했다.

그 생각이 조금 늦게 떠올랐다. 그러자 다시 가슴이 따뜻해졌다. 마사오는 세수를 하고 거실로 나갔다. 식탁에는 밥과 된장국, 구운 생선이 차려져 있었다. 사에코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였지만, 피곤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잘 잤어요?”

사에코가 물었다.

“응. 당신은?”

“저도요.”

마사오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좀 쉬어. 어제 힘들었잖아.”

“네.”

사에코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앉지 않았다. 찬장 쪽으로 가서 서랍을 열었다.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니, 두 장이었다. 접히지 않은 깨끗한 종이.

마사오는 처음에 그것이 켄이치 부부와 관련된 서류라고 생각했다. 어제 받은 축의금 정리표나 호텔 영수증, 아니면 혼인신고서 사본 같은 것. 그는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떠먹고 물었다.

“그건 뭐야?”

사에코는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종이를 마사오 쪽으로 밀었다.

마사오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종이 위의 글자를 보았다.

이혼신고서.

처음에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잘 아는 한자들인데, 한 문장으로 묶이지 않았다. 이혼. 신고서. 그 둘이 왜 자신의 식탁 위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종이를 다시 보았다.

사토 마사오.

사토 사에코.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서류는 분명했다.

마사오는 웃으려 했다.

“뭐야, 이게.”

사에코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거예요.”

“우리 거라니.”

“이혼신고서예요.”

“그건 나도 알아.”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왜 이게 여기 있냐는 거야.”

사에코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써줬으면 해요.”

마사오는 그녀를 보았다.

사에코는 평소와 같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는 단정하게 묶었고, 식탁 위에는 아침밥이 있었다. 어제 결혼식에서 기모노를 입고 조용히 울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마사오는 이 상황이 장난처럼 느껴졌다.

“켄이치 결혼식 다음 날이야.”

그가 말했다.

“알아요.”

“알면서 이래?”

“그래서요.”

“그래서?”

마사오는 웃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았지만 웃는 모양을 만들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사에코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끝났어요.”

“뭐가.”

“내 일.”

마사오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 일?”

“네.”

“무슨 일이 끝났다는 거야.”

사에코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마사오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들었다. 전에는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아침이 늘 바빴고, 퇴직 뒤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켄이치도 결혼했어요.”

사에코가 말했다.

“그렇지.”

“집 대출도 끝났고요.”

“그것도 끝났지.”

“당신도 회사에서 나왔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에코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나도 나오려고요.”

마사오는 숨을 멈췄다.

나도 나오려고요.

그 말이 식탁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

그는 겨우 물었다.

사에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사오는 대답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집. 결혼. 아내. 어머니. 사토라는 성. 이 식탁. 이 모든 것.

“당신이 무슨 회사 다닌 것도 아니잖아.”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후회했다.

사에코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화내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렇죠.”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퇴직금도 없어요.”

마사오는 입을 다물었다.

“사에코.”

그는 이름을 불렀다. 이상하게 낯설었다. 평생 불러온 이름인데, 식탁 위의 서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들렸다.

“갑자기 왜 그래.”

사에코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아니에요.”

“그럼 언제부터야.”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너무 오래돼서요.”

마사오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어제의 피로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아니, 피로가 아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 질문은 너무 흔했다. 그러나 마사오는 그것 말고 물을 말이 없었다.

사에코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식탁 위의 된장국 그릇을 보았다. 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잘못한 걸 묻는 거면, 없어요.”

“그럼 왜.”

“당신은 잘했어요.”

마사오는 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왜 이혼을 해.”

“나도 잘했으니까요.”

그 말은 조용했다. 그러나 마사오는 그 말이 처음 듣는 종류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도 잘했다.

사에코가 자기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마사오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늘 사에코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수고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잘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사에코가 스스로 “나도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잘했으면 같이 살면 되잖아.”

마사오가 말했다.

“이제 편하게 살면 되잖아. 켄이치도 자리 잡았고, 우리 빚도 없고…”

말하다가 그는 멈췄다.

그 말들은 자신이 수없이 되뇌던 말이었다.

켄이치도 자리 잡았고.

빚도 없고.

이만하면 됐고.

그 말들이 갑자기 허공에서 힘을 잃었다.

사에코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한테는 그게 끝이었죠.”

“당신한테는 아니야?”

“나한테도 끝이에요.”

“그럼…”

“끝났으니까요.”

마사오는 더 이상 말을 찾지 못했다.

식탁 위에는 아침밥과 이혼신고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된장국 냄새, 구운 생선 냄새, 종이 냄새. 너무 평범한 아침 냄새 속에, 너무 평범하지 않은 종이가 있었다.

그는 문득 젊은 날을 떠올렸다.

공장 기숙사 뒤 세탁장. 비가 내리던 날. 사에코가 작업복을 비틀어 빨고 있었고, 자신이 말했다.

그거, 그렇게 비틀면 단추 떨어져.

사에코가 대답했다. 알아요. 그 말끝에 에치고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알아들었고, 그녀도 그의 아키타를 알아들었다. 둘은 서로의 약점을 잡았지만, 무기로 쓰지 않았다.

서로 못 들은 걸로 하지.

그 말로 둘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마사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못 들은 척해주는 것. 상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것. 말끝이 무너져도, 친정 이야기가 나와도, 본사 앞에서 작아져도, 서로 모른 척해주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다정함이었다.

마사오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 종이를 못 본 걸로 하자.

이 말을 못 들은 걸로 하자.

어제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하자.

켄이치 결혼식 때문에 마음이 허해진 거라고 하자.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자.

그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에코는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은 피곤해 보였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마사오가 아는 사에코의 눈이었다. 고등학교 입시 안내서를 읽던 눈. 켄이치의 합격 통지서를 접던 눈. 마지막 도시락을 싸던 아침의 눈. 무언가를 결정하면, 조용히 끝까지 해내던 사람의 눈.

마사오는 알았다.

이번에는 못 들은 걸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이혼신고서를 다시 보았다.

이름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도장을 찍을 자리도 비어 있었다. 깨끗한 종이였다. 마치 무엇이든 새로 쓸 수 있다는 듯이.

마사오는 손을 뻗지 못했다.

“켄이치는 알아?”

그가 물었다.

“아직요.”

“말할 거야?”

“말해야죠.”

“뭐라고.”

사에코는 잠시 생각했다.

“임무는 끝났다고요.”

마사오는 고개를 들었다.

“임무?”

“네.”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족이 임무야?”

사에코는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기쁜 웃음도, 비웃음도 아니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람을 바라보는 웃음 같았다.

“당신도 그렇게 살았잖아요.”

마사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전날 밤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키타 촌놈이 도쿄 와서 집 장만하고, 자식 좋은 직장 보냈으면 성공한 거지. 암.

그 말은 자신을 달래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묶는 말이었다. 그는 그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성공이라는 말로 허전함을 눌렀듯, 사에코도 아내와 어머니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눌러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말하는가.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사오가 듣지 못했거나, 못 들은 척했을 뿐이다.

“나는…”

그는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그 말은 너무 어린아이 같아서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평생 공장에서 사람들을 이끌었고, 집을 샀고, 아들을 본사에 보냈고, 후배에게 길을 비켜준 남자가 이제 와서 아내 앞에서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말 몰랐다.

사에코는 일어났다.

“밥 식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마사오는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밥?”

“네. 먹어요.”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작은 접시를 하나 더 가져왔다. 어제 결혼식 답례품으로 받은 절임이었다. 뚜껑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고향의 것인지, 도쿄 백화점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깔끔한 절임 냄새.

사에코는 그것을 식탁에 놓았다.

“오늘은 이거 먹어요.”

마사오는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식탁 위에는 된장국이 식어가고 있었다. 구운 생선의 껍질은 조금 말라 있었다. 이혼신고서는 밥그릇 옆에 그대로 있었다. 창밖에서는 아침 햇빛이 마당의 감나무 잎에 닿고 있었다.

마사오는 아주 오래전에 세탁장 지붕을 때리던 비 소리를 다시 들은 것 같았다.

그날 그는 사에코의 말끝을 못 들은 걸로 했다. 그 덕분에 둘은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식탁 위의 종이는, 못 들은 걸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필로그. 반장의 아들

사에코가 나간 뒤, 집에는 소리가 줄었다. 처음 며칠은 냉장고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가 너무 컸다. 그다음에는 그런 소리조차 익숙해졌다. 마사오는 스스로 밥을 지었고, 실수하면서 세탁기를 돌렸고, 쓰레기 분리수거 표를 냉장고에 붙여두었다. 사에코가 떠난 뒤에야 그는 집 안의 일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밥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행주가 저절로 마르는 것이 아니었다. 계절 옷이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냉장고 안의 된장이 떨어지기 전에 누군가 샀던 것이다.

그 누군가가 사라지자, 집은 갑자기 설명서를 잃은 기계가 되었다.

그래도 마사오는 살아갔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공장에서 기계가 멈췄을 때도 그랬다. 일단 원인을 찾고, 가능한 것부터 손댄다. 밥이 타면 물을 줄이고, 빨래가 줄어들면 다음엔 찬물로 돌리고, 청소기 봉투가 차면 설명서를 읽는다.

살아가는 일도 수리와 비슷했다.

다만 고쳐도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달랐다.

어느 날, 켄이치가 집에 온다고 했다.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나, 초인종이 울렸다.

마사오는 거의 뛰듯이 현관으로 갔다. 문을 열자 켄이치가 서 있었다. 회색 재킷에 짙은 바지, 넥타이는 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살이 조금 붙었고, 눈가에는 피로가 있었다. 하지만 자세는 여전히 반듯했다.

“아버지.”

“왔냐.”

마사오는 켄이치 뒤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혼자야?”

“응.”

“애는?”

켄이치는 구두를 벗으며 대답했다.

“오늘 학원도 있고, 친구 약속도 있고. 도쿄 애들은 바빠.”

그는 가볍게 웃었다.

“며느리는?”

“같이 오려고 했는데, 일이 좀 있어서.”

“그래.”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쿄 애들은 바쁘다.

맞는 말일 것이다. 마사오는 사두었던 과자 봉지를 보이지 않게 식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차 마실래?”

“응. 조금만.”

켄이치는 거실에 앉았다. 그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사에코가 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물건들의 위치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쿠션은 제자리를 살짝 벗어나 있었고, 신문은 모서리가 맞지 않게 접혀 있었고, 꽃병은 비어 있었다.

켄이치는 그것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사오는 차를 내왔다. 물을 너무 뜨겁게 끓였는지 잔을 잡는 손이 조금 뜨거웠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찻잔을 내려놓았다.

“일은 어때.”

마사오가 물었다.

켄이치는 찻잔을 들고 잠시 웃었다.

“바빠.”

“늘 바쁘지.”

“요즘은 더.”

“관리직 됐다며.”

“응. 작년에.”

마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네.”

“운이 좋았어.”

켄이치는 그렇게 말했지만, 운이 아니라는 것을 둘 다 알았다. 그는 잘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필요한 것을 빨리 배우고, 틀린 곳을 고치고, 다음 문을 찾았다. 사에코가 그렇게 만들었고, 마사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마사오는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자랑스러움은 예전처럼 곧장 따뜻하게 올라오지 않았다. 중간에 무언가에 걸렸다. 켄이치는 이제 본사 사람 중에서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을 배치하고, 숫자를 보고, 비용을 줄이고, 방향을 정하는 쪽에 가까워졌다.

공장에서 평생 숫자의 대상이었던 마사오의 아들이, 이제 숫자를 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잠시 말이 끊겼다.

마사오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네 엄마는 잘 있냐.”

켄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응.”

“그래.”

“지난달에도 만났어.”

마사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난달에도?”

켄이치는 아차 하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숨길 생각이 없었던 듯했다.

“응. 가끔 만나. 전화도 하고.”

마사오는 잠시 켄이치를 보았다.

“나한테는 말 안 했잖아.”

켄이치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아버지가 안 물었잖아.”

그 말은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마사오는 더 아팠다. 그 말은 맞았다. 그는 묻지 않았다.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사에코가 어디 사는지, 밥은 먹는지, 몸은 괜찮은지, 켄이치와 연락하는지. 묻는 순간 자신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뭐라더냐.”

“뭘?”

“나에 대해서.”

켄이치는 찻잔 안쪽을 보았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마사오는 숨을 삼켰다.

“그런 말도 했냐.”

“응.”

“그런데 왜…”

말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려다 멈췄다. 왜 나갔냐. 왜 이혼했냐. 왜 켄이치 결혼식 다음 날이었냐. 왜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 그런 질문들은 수없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너무 초라했다.

켄이치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더 오래 걸렸대.”

마사오는 고개를 들었다.

“뭐가.”

“나가는 데.”

방 안이 조용해졌다.

사에코가 한 말인가. 정말 그렇게 말했는가. 마사오는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몇 번 반복했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더 오래 걸렸다.

그 말은 용서처럼 들리면서도, 어떤 판결보다 무거웠다.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에코는 더 오래 남았다. 자신이 성실했고, 가족을 위해 일했고, 술로 집안을 망치지도 않았고,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나갈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하는 데 더 오래 걸렸다는 뜻이었다.

마사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켄이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엄마, 요즘 자기 얘기를 좀 해.”

“자기 얘기?”

“응. 에치고 얘기.”

마사오는 눈을 깜박였다.

“그 사람이?”

“응. 예전엔 거의 안 했잖아.”

“그렇지.”

사에코는 에치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아주 가끔 했다. 눈이 많이 왔다. 어머니가 무 절임을 잘했다.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도쿄로 왔다. 그 정도였다. 마사오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치고 출신. 집단취업. 하치오지 공장. 그 정도면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켄이치가 말했다.

“중학교 졸업식 다음 날 역에 갔던 얘기. 도쿄 와서 처음엔 표준어가 무서웠다는 얘기. 기숙사에서 밤에 몰래 울었다는 얘기. 외할머니가 편지에 돈 얘기만 써서 그 편지를 읽기 싫었다는 얘기.”

마사오는 찻잔을 보았다.

사에코가 그런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켄이치에게. 자신에게가 아니라, 켄이치에게.

“그런 건…”

마사오는 말을 시작했다.

“나도 알아.”

켄이치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알아?”

마사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사에코가 에치고를 말하려 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비켜섰다. 사에코도 그가 아키타를 말하려 할 때 비켜섰다. 서로의 말끝을 못 들은 척하는 것으로 시작한 부부였다. 그 못 들은 척이 배려라고 믿었다.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덮어준 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켄이치가 말했다.

“엄마가 그러더라. 네 아버지도 아키타 얘기 안 했지, 하고.”

마사오는 무릎 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켄이치가 어릴 때, 그가 아키타 말을 흉내 낸 적이 있었다. “아빠 이상한 말 해.” 아이는 웃었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다. 그 뒤로 마사오는 집에서도 더욱 말끝을 조심했다. 사에코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이런 말도 했어.”

켄이치가 잠시 멈췄다.

“뭐라고.”

“아버지도 자기 고향을 숨기느라 힘들었을 거라고.”

마사오는 눈을 감았다.

사에코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는 결국 물었다.

“왜 나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대.”

켄이치는 대답하기 어려운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한테 말하면, 아버지가 또 괜찮다고 했을 것 같대.”

마사오는 말문이 막혔다.

괜찮다.

그는 평생 그 말을 했다. 허리가 아파도 괜찮다. 본사 앞에서 작아져도 괜찮다. 후배가 먼저 공장장이 되어도 괜찮다. 아들이 희망퇴직 조건을 가져와도 괜찮다. 사에코가 이혼신고서를 내밀었을 때도, 며칠 뒤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괜찮다. 아키타 촌놈이 도쿄 와서 집 장만하고, 자식 좋은 직장 보내고, 이만하면 됐다. 괜찮다.

그 말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말이 사에코의 말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켄이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아버지를 미워해서 나간 건 아니래.”

마사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뭔데.”

“자기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대.”

그 말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마사오는 식탁 위의 찻잔, 비어 있는 꽃병, 창밖 감나무를 차례로 보았다. 자기 이름으로 산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듯하면서도 알 수 없었다. 그는 평생 사토 마사오로 살았다. 그러나 그 이름은 늘 다른 말들과 붙어 있었다. 아키타 출신. 공장 반장. 사에코의 남편. 켄이치의 아버지. 퇴직자.

사에코도 그랬을 것이다. 사토 사에코. 마사오의 아내. 켄이치의 어머니. 하치오지 사택의 부인. 도쿄 아이의 엄마.

그 앞에 그냥 사에코가 있었는지, 마사오는 이제야 묻게 되었다.

켄이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차였다.

“아버지, 오늘 온 건 엄마 얘기만 하러 온 건 아니야.”

마사오는 고개를 들었다.

“그럼.”

켄이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아들이 아니라 회사 사람이 말하기 시작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사에코 이야기를 한 뒤라, 그 얼굴도 이전처럼 멀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공장 얘기야.”

그 말이 나오자 마사오의 손이 멈췄다.

공장.

퇴직한 지 십년이 지났지만, 그 말은 여전히 몸 어딘가를 깨웠다. 아침 조회, 기계 소리, 기름 냄새, 작업모, 요시다의 목소리. 그는 이제 그곳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곳은 아직 그 안에 있었다.

“왜.”

“요즘 상황이 안 좋아.”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다.”

“생각보다 더 안 좋아.”

켄이치는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려다 멈췄다. 아마 집에서까지 서류를 꺼내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대신 손만 탁자 위에 올렸다.

“단가가 안 맞아. 납기도 늦고. 불량률은 낮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시장은 품질만으로 버틸 수가 없어.”

마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외 공장하고 비교하면 비용 차이가 너무 커. 본사에서도 계속 말이 나와. 지금 공장을 유지하려면 방식 바꿔야 해. 다품종 소량, 현장 조정, 사람 손으로 맞추는 방식… 그런 걸로는 안 돼. 표준화하고, 싸게, 빨리, 많이 만들어야 해.”

켄이치는 말을 멈췄다.

“이대로면 해외 이전밖에 방법이 없어.”

“해외.”

“응.”

마사오는 그 말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예전 같으면 화부터 났을 것이다. 이제는 화보다 먼저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 라인이 줄고, 사람이 줄고, 협력업체가 닫고, 식당의 불이 꺼지고, 사택이 헐리고, 공장 담장만 남는 그림.

공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회사 건물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마사오가 청년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반장이었던 시간이 지도에서 천천히 지워지는 일이었다.

켄이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버지, 쉽게 가려면 나는 해외이전안에 그냥 찬성하면 돼. 숫자로는 그게 제일 깔끔해.”

마사오는 아들을 보았다.

“깔끔하다고?”

“응. 경영진도 그걸 원해. 국내 공장 살리겠다는 주장은 감정적으로 보이거든.”

켄이치는 잠시 웃었다. 웃음에 힘이 없었다.

“본사에서는 내가 이 얘기만 하면 아직도 반장 아들이라고 봐.”

마사오의 얼굴이 굳었다.

“누가 그렇게 말하냐.”

“대놓고는 안 해요.”

켄이치의 말투가 아주 잠깐 어릴 때로 돌아갔다. 존댓말이 섞였다. 아마 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알아요.”

마사오는 그 말을 이해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마사오는 그것을 평생 알았다. 본사 주임 앞에서, 사택단지에서, 호텔 로비에서, 아들의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더 분명한 것들이 있다.

“그게 싫으냐.”

마사오가 물었다.

켄이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전에는 싫었어.”

“지금은?”

“요즘은… 그게 없으면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설명이 안 돼.”

마사오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켄이치가 본사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공장 반장의 아들이 본사로 가면, 마사오와 사에코의 사투리와 기숙사와 잔업과 입시 도시락이 모두 보상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본사 안에서도 켄이치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공장의 그림자를 달고 있었다.

아들은 너무 멀리 간 것이 아니었다.

멀리 갔는데도, 아직 끌려 있었다.

“나는 그 공장을 그냥 정리 대상 숫자로 볼수 없어.”

켄이치가 말했다.

“아버지가 거기서 일했고, 엄마가 그 도시락을 쌌고, 내가 그 돈으로 학교를 다녔잖아.”

마사오는 찻잔을 잡았다.

“그런데 지키려면, 우리가 하던 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거냐.”

“응.”

“장인정신 같은 건 이제 내려놓고.”

켄이치는 그 말을 바로 받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두면 진짜 없어져.”

“바꾸면 남냐.”

“모르겠어.”

켄이치가 솔직히 말했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어. 해외로 다 옮기는 것보다는.”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덧붙였다.

“회의 자료에는 ‘현장 조정 공수’라고 적혀 있어. 줄여야 할 비용으로.”

마사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근데 나는 그게 뭔지 알아. 아버지 손이 하던 일이잖아.”

방 안이 조용해졌다.

현장 조정 공수.

본사 언어로는 비용.

마사오의 몸으로는 기술.

젊은 작업자들에게는 배워야 할 감각.

요시다에게는 아직 버릴 수 없는 자부심.

마사오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기름때는 이제 거의 없었다. 퇴직하고 시간이 지나자 손톱 밑도 깨끗해졌다. 그러나 손마디는 여전히 굵었고, 흉터는 남아 있었다. 그 손이 하던 일이 이제 줄여야 할 공수로 적혀 있었다.

“요시다는 뭐래.”

마사오가 물었다.

“버티고 있어.”

“그럴 거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부탁하는 거야. 요시다 씨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잖아.”

마사오는 조용히 웃었다.

“존경받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라고?”

켄이치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사오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한 모금 마셨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네 말은 알겠다.”

켄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아는 것하고, 말할 수 있는 건 다르다.”

“아버지.”

“그래도 말해야 하는 거겠지.”

켄이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마사오는 창밖을 보았다. 마당의 감나무는 잎이 많이 줄어 있었다. 올해 열매는 별로 달리지 않았다. 몇 개 달린 것도 새가 쪼아 먹었다. 사에코가 있었다면 익기 전에 따서 떫은지 단지 확인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제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집에 없었다.

마사오는 식탁 아래에 밀어 넣은 과자 봉지를 떠올렸다. 초콜릿 과자, 귤 젤리, 작은 센베. 손자가 오면 주려고 샀던 것들.

그는 묻지 않았다.

왜 안 왔느냐고도, 다음에는 오느냐고도. 그런 질문은 묻는 순간 초라해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요시다한테 전화는 해보마.”

켄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말은 해본다. 설득이 될지는 몰라.”

“고마워.”

켄이치의 목소리에는 안도가 있었다. 마사오는 그 안도를 보며, 자신이 두 시간 전부터 계속 피하고 있던 사실을 받아들였다. 켄이치는 공장을 버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붙잡고 있었다. 다만 그 말들이 모두 본사의 말이었을 뿐이다.

“밥 먹고 가라.”

마사오가 말했다.

켄이치는 시계를 보았다.

“오늘은 좀…”

“바쁘냐.”

“응. 미안. 저녁에 다시 약속이 있어서.”

“그래.”

마사오는 더 묻지 않았다.

켄이치가 돌아갈 때, 그는 현관에서 잠시 멈췄다.

“아버지.”

“왜.”

“엄마가…”

켄이치는 말을 고르는 듯했다.

“아버지 혼자 밥 잘 챙겨 먹는지 물어보더라.”

마사오는 잠시 굳었다.

“그 사람이?”

“응.”

“뭐라고 했냐.”

“잘 드신다고 했어.”

켄이치는 작게 웃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사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에코가 물었다. 밥은 잘 먹는지. 그 정도의 질문.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한참 마음속에 남는 질문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마사오는 말하다 멈췄다.

뭘 전하라고 할 것인가.

잘 지낸다고?

미안하다고?

돌아오라고?

네가 없으니 밥이 어렵다고?

아무 말도 맞지 않았다.

“아니다.”

그가 말했다.

켄이치는 고개를 숙였다.

“갈게.”

문이 닫히고, 차 소리가 멀어졌다.

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마사오는 식탁 아래 과자 봉지를 꺼냈다. 포장지의 색이 지나치게 밝았다. 그는 한참 그것을 보다가 찬장에 넣었다. 다음에 오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이 있다면.

거실로 돌아와 전화기를 보았다.

요시다의 번호는 아직 수첩에 있었다. 휴대전화에도 저장되어 있었지만, 마사오는 오래된 수첩을 꺼냈다. 기름때가 묻은 낡은 수첩. 퇴직 전까지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이다.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몇몇 페이지는 모서리가 접혀 있었다.

요시다 공장장.

마사오는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공장을 지키려면 공장을 바꿔야 한다.

장인정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더 싸게, 더 빨리,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켄이치의 말이었다.

본사의 말이었다.

시장의 말이었다.

아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마사오는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한 번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마당으로 나갔다. 감나무 아래에 낙엽이 조금 쌓여 있었다. 그는 빗자루를 들었다. 천천히 쓸었다. 이번에는 낙엽이 제법 한곳으로 모였다. 사에코가 있었다면 그래도 몇 장은 남았다고 했을 것이다. 아니, 말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쓸었을 것이다.

마사오는 빗자루를 세워두고 하늘을 보았다.

하치오지도 도쿄야.

젊은 날 신주쿠에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사에코는 조금 기뻐했었다. 하치오지도 도쿄. 그 말 하나로 둘은 조금 덜 초라해졌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마사오는 도쿄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공장에 살았던 것 같았다.

공장은 회사이면서 본사가 아니었다.

마사오는 관리자였지만 본사 사람이 아니었다.

켄이치는 공장 반장의 아들이었지만 이제 본사의 관리직이다.

사에코는 사토 사에코였지만, 이제 다시 사에코로 살아보려 했다.

그 모든 선이 이제 공장 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공장은 숫자가 되기 시작했다.

인건비.

생산 단가.

물류비.

감가상각.

현장 조정 공수.

해외 이전 비용.

그러나 그 숫자들 사이 어디에도, 세탁장 뒤 비 오는 날이나 마지막 도시락 냄새는 들어가지 않았다.

마사오는 집 안으로 들어가 전화기 앞에 앉았다.

수첩을 펼쳤다.

요시다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갔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금 늙었지만, 여전히 현장의 목소리였다.

“나요.”

마사오가 말했다.

“사토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있었다.

“반장님?”

그 호칭을 듣는 순간, 마사오는 눈을 감았다.

반장님.

그 이름은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으로 할 말은 예전과 달랐다. 기계를 멈추지 말라는 말도, 불량을 잡으라는 말도, 납기를 맞추라는 말도 아니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요시다.”

“네.”

“공장 얘기 좀 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요시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마사오는 마당의 감나무를 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지는 앙상했다. 몇 장 남은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키려는 게 뭔지부터.”